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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30. 2020

남자 신발을 주워왔다.

이혼 전 이야기 #. 14

직장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남편과 함께 육아 전투를 치르며 생활했던 것이 아니기에 육아와 가사는 정신적으로 힘들지도 버겁지도 않았다.

몸은 고달팠지만, 더 이상 죽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 퇴근길이 지옥 같지도 않았다.


보험대출을 받아 마련한 우리 집은 달동네에 있었다. 앞집은 나이 드신 부부가 심심찮게 아침부터 싸우느라 시끄러웠고, 밤에는 '찹쌀떡~! 메밀묵~!'이라고 외치는 아저씨가 지나가는 동네였다.

저 아래 큰길에서 집까지 오려면 오르막을 한참 걸어 올라와야 했다.


3가구가 사는 다가구 주택 앞에 할당된 주차구역은 딱 한자리였다. 윗집 아가씨는 차가 없는듯했고 아랫집 아저씨는 택시기사였다.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살고 있었던 듯했다.


퇴근하고 미술학원에서 큰아이를 찾고, 가정 어린이집에 가서 둘째 아이를 찾았다. 

종일 엄마를 기다리는 몇 안 되는 남은 아이들 중에 우리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집 앞까지 와도 주차할 자리가 없으면 한참 내려가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올라와야 했다. 


공영 주차장도 그나마 자리가 있을 때 주차가 가능했다. 게다가 주차비도 내야 하니, 내 집 앞에 주차를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 일인 줄은 몰랐다. 

주차전쟁일지라도 주차공간이 있는 길 건너 허름한 아파트가 대궐집처럼 너무 부러웠다.


늘 택시가 주차되어 있던 집 앞이 웬일인지 비어있었다. 

너무 기분이 좋아 주차를 하고 집으로 쏙 들어왔다. 한참 지났을까, 밖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아랫집 택시기사 아저씨였다.


아줌마, 저기다가 주차하면 어떻게 해요?

"네? 저기는 같이 쓰는 자리 아닌가요? 저도 이 집에 사는데요?"

"아니, 지금까지 쭉 내가 주차하던 자리인데 이제 와서 여기서 산다고 주차하면 어떡해요. 저기는 항상 내가 대던 자린데.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 그러면 안되죠. 차 빼요."


어이가 없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말다툼을 하다가는 아이들이 불안해할 것 같았다.

상대는 남자였다. 남편이 있으면 불러다가 해결하면 될 텐데 나는 젊은 새댁이고 하필 남편이 없었다. 아랫집 아저씨보다 두배는 덩치가 큰 아줌마랑 같이 있었다. 


남편이 없는 것이, 내가 저기에 주차한 것이 잘못이 아닌데도 더 말을 섞기 싫었다.

차를 빼서 큰길 아래 공용주차장으로 갔다. 정기주차를 물어보았다. 주차 관리하시는 할아버지가 말했다.

"여기도 주차장이 포화상태예요. 정기주차는 힘들어."

"저 위에 사는데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서 그래요, 방법이 좀 없을까요?"

"나도 몰래 해주는 일이라 좀 그래. 돈을 더 내면 뭐 방법은 있지."


웃돈을 더 얹어달라는 말이었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차난이 심각한 좁은 동네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집에서 한참 내려와야 하는 곳에 주차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돈을 두배를 주고 정기주차를 해야 했다. 


전쟁 같은 아침 출근길, 아직은 유치원을 다녔던 둘째를 둘러업고 걸어 내려오다 보면 쉬가 마렵다고 했다.

집으로 다시 올라가기도 빠듯하고, 주차장까지 단박에 갈 수가 없는 거리였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파출소로 불쑥 들어갔다.

"저... 죄송한데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가 급하다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아이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오르막을 잘 올라왔다. 하지만 그럴 때는 몇 번 되지 않았다.

작은 아이를 둘러업은 손가락 끝에 유치원 가방을 걸고, 나는 왜 업어주지 않냐고 훌쩍 거리는 큰아이와 보폭을 맞추어 천천히 걸어 올라오는 게 일상이었다. 


하루는 아이가 열이 나고 아팠다. 감기인듯했다. 직장을 나가야 하니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쌀쌀해지는 찬바람에 아이를 주차장까지 데리고 가는 게 안쓰러워서 아침을 챙겨주며 말했다.

"엄마가 저 밑에 가서 차 가지고 올라올게. 일단 밥 먹고 있어, 알았지?"


뛰어서 공영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를 가지고 집 앞까지 왔지만 변함없이 택시가 주차되어 있었다. 눈을 흘기며 택시를 지나쳐 근처를 한참 뱅뱅 돌았다

주차할 자리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큰길 옆에 주차를 하고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이 외투를 입히고 감기약을 통에 담아 급하게 내려왔다. 


차를 세워둔 건 10분남짓이었다.

큰 길가에 혼자 덩그러니 세워져 있던 내 차에 뭔가 붙어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불법주차 딱지였다.


 벌금은 며칠 먹을 반찬거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늘은 저어기 밑에 안 내려간다 엄마!^^"

열이 펄펄 나는 아이가 빙긋 웃었다.


찬바람에 시린 뺨 위로 따뜻한 눈물이 핑 돌아서 내려왔다. 아이가 볼까 봐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 그렇지?"

주차장이 없어도 좋으니 돈을 좀 더 모아서 평지에 있는 집에라도 이사 갈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아랫집 아저씨가 또 문을 두드렸다.

"내가 오늘부터 고향에 내려갈 거예요. 그동안은 저기 자리가 비니까 아줌마가 주차해도 돼요."

인심 쓰듯 웃으며 말했다. 


미친놈. 

자리를 맡아놓으라는 거겠지, 어차피 고향에서 올라오면 또 차를 빼라고 할 것이 뻔했다.

"됐습니다 아저씨. 저 그 자리에 주차 안 할 거예요. 아저씨 혼자 쓰세요."

머쓱하게 돌아가는 아저씨였다.


가끔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오면서 <아저씨 전용 자리>에 누군가가 주차를 해서 난감한 표정으로 차주인에게 연락하고 있는 아저씨를 종종 보았다. 전화받지 마라 전화받지 마라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작고 허름한 이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가장 걱정되었던 건 '여자가 딸아이 둘만 데리고 산다'라고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었다. 동네도 낯설고 마음도 불안했다. 어린 딸들이 둘인 내게 치안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 그것도 1층에 살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몇 번 흔들면 열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나무틀로 된 창문이었다.


분리수거장에서 남자 구두를 하나 주워왔다.

-우리 집에는 남자가 있어요-라고 간접광고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라도 볼 수 있게 구두를 일부러 현관밖에 내놓았다. 


신을 남자가 없었던 구두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신지 않는 신발이란 걸 알게 될까 봐 며칠에 한 번씩 주인 없는 남자 신발을 닦아 놓았다.

남편이 없는 내가 남편 있는 여자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주민센터에서 출입문에 부착할 수 있는 경보기를 무료로 준다는 말을 들었다. 

창문에 붙여 놓으면 문이 열릴 때 경보음이 울리는 장치였다. 불안했던 나는 주민센터에 얻으러 갔다.

담당 공무원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청에 가야 준다고 했다. 다시 구청으로 갔다. 


공짜 물건을 바라서인가, 한참을 기다린 뒤 먼지 묻은 경보기 몇 개를 받을 수 있었다. 

손에 꼭 쥐고 집으로 달려와 창문마다 붙였다.


집 앞에 놓인 남자 신발을 다시 한번 반듯하게 놓았다.




큰아이는 겨우 8살이었는데도 내가 퇴근이 늦을 때면 어쩔 수 없이 혼자 미술학원을 나와 어린이집까지 걸어가서 동생을 찾아와야 했다. 

"미안한데, 엄마가 지금 가고 있거든? 근데 차가 많이 막혀 어쩌지? 어린이집에 6시까지는 가야 되는데, 동생 좀 데리고 나와줄래? 엄마가 그때까지는 도착할 것 같아"


아이가 큰 도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게 불안해서 항상 내가 먼저 서둘렀다. 

하지만 직장에서 출발이 5분만 늦어도 퇴근길 도로는 난리였다. 정신없이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어린이집 근처까지 가니 큰아이가 동생 손을 꼭 잡고 인도에 서서 오는 차들 속에 엄마 차를 찾고 있었다.




내가 살겠다고 아이 유치원을 옮기고 집을 이사하고, 낯선 동네로 아이들을 데려온 건가.

내가 편하자고 아이들을 아빠와 할머니와 떨어뜨려놓은 건가.

아직은 너무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길가에 세워놓았다.


아이가 키가 작아 차들의 헤드라이트에 눈이 부셨을 것이다. 

이제는 다 컸는데도 그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모습이 가슴에 박혀서 지워지지 않는다.


엄마는 죽어도 너희들을 잘 키워낼 거야.

좋은 집, 좋은 차는 없어도 엄마는 꼭 너희들을 웃게 할 거야.

엄마가 살겠다고 너희들을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가장의 책임감과 세상에 대한 자격지심과 드러나지 않는 오기로 무장한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33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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