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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8. 2020

장모가 보낸 택배를 반품하겠다는 남편

이혼 전 이야기 #.12

친정엄마는 사위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 문자를 받기 전까진 모르고 계셨다. 이년 저년 욕을 듣고 내 돈 내놓으라고 뺨을 때려대는 치매노인들 수발을 드는 힘든 직장일을 하시면서도 퇴근하면 밭농사, 논농사를 지어 그 들판에서 나는 곡식과 채소를 꼭 사위 이름으로 택배를 보내셨다.


엄마의 장래희망은 

당신처럼 남편에게 맞고 살다가 과부가 되어 고생하는 박복한 여자의 삶이 아닌, 결혼한 딸들이 남편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었을까...


환한 달빛이 키보다 높은 옥수숫대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검푸른 조명을 밝혀주는 새벽 1시.

늦여름이면 엄마는 억센 옥수수 잎에 손이 베이는지도 모르고 날짐승들이 싸우는 소리를 장단 삼아 옥수수를 꺾어 날이 밝은 대로 보내셨다.


기계에 말리는 것보다 마지막 따가운 빛으로 내리쬐는 가을 햇살에 말린 나락이 더 맛있다며 집앞에 멍석을 깔고 일일이 펴서 말리셨다.

당신은 일 년 내내 묵은쌀로 밥을 해 드시면서도 가장 먼저 말린 햅쌀을 사위와 사돈이 있는 우리집에 보내셨다. 


결혼하고서는 한 번도 마트에서 쌀을 산 적이 없었다. 쌀을 퍼내다 보면 꼬깃꼬깃 접은 만 원짜리가 몇 장 나왔다. 그렇게 당신 수중에 있는 돈까지 탈탈 털어 쌀과 함께 보내주셨다.


그런 엄마가 쌀이 떨어질 즈음 택배를 보내셨다. 갓 도정한 쌀과 찹쌀, 곡식 몇 가지였다.

퇴근하고 집에 가니 뜯지 않은 쌀자루가 그대로 있었다. 보통 시어머니가 택배를 뜯어서 종류별로 정리를 하셨는데 현관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거 건들지 말라고 해서 안 건들었다. 아비가 처가에서 보낸 거는 필요 없다고 다시 택배로 보내버린다고 날더러 손도 대지 말라고 하더라



나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남편이었다. 

당장 남편에 대한 분노보다, 아들을 야단치지 못하고 그대로 따르는 시어머니에 대한 서운함보다, 읍내로 가져가서 힘들게 보낸 택배가 반품이 되어 돌아왔을 때의 엄마 표정이 상상이 되었다. 

내가 출근한 사이 정말로 택배기사를 불러 반품으로 보내버릴까 봐 애가 탔다.


벗었던 옷을 도로 입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이 택배 아저씨가 아파트 4층으로 짊어지고 온 쌀자루를 대여섯 번 오르내리며 내차에 겨우 실었다. 이 쌀들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몇 안 되는 지인들의 목록을 뒤지느라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이혼한 언니가 있었다. 혼자 애들을 키우니 살림살이도 넉넉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뜬금없이 전화를 해서 언니에게 집에 쌀이 있냐고 물었다. 엄마가 쌀을 보내셨는데 나눠먹으라고 넉넉하게 주셔서 언니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남편이 다시 보내버릴 거라고 하니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언니에게 주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집까지 가져다주겠다고 하고 시동을 걸었다. 


엄마가 새벽부터 낡은 오토바이에 한 포대씩 부지런히 실어날랐을 그 쌀들을 트렁크가 아닌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을 했다. 트렁크에 넣을 수가 없었다. 

내 엄마 같았다.

그냥 쌀일 뿐인데 거기서 엄마 냄새가 났다. 엄마가 허리 숙여 피를 뽑던 그 논바닥 냄새가 났다.


'미안해요 엄마 내가 미안해요. 마음으로 정말 배부르게 잘 먹을게요.'


쌀을 내려주고 돌아오면서 씩씩하게 전화를 했다.

"엄마, 뭘 이렇게 많이 보내셨어! 시어머니가 잘 먹는다고 감사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애들 아빠? 애들 아빠도 당연히 감사하다고 하지~~"


너덜너덜해진 가슴에 헝겊을 대충 대어 겨우 기워가며 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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