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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6. 2020

30대 졸혼. 너희들끼리 잘 살아

이혼 전 이야기 #.9

엄마도 결국 나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사위의 폭탄 같은 문자를 받은 뒤 친언니를 독촉해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알게 되셨다.


가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엄마방에서 자고 또 자도 마약에 취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과 남편은 직장이 바빠서 같이 못 왔다며 아이들만 데리고 내려갔던 것.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나 혼자 엄마를 보러 가거나 늘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나를 보고 짐작은 하셨으리라. 


시어머니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는 것을 싫어하셨다. 

주된 이유는 주말을 이용해 친정에 가면 교회에 못 데리고 간다는 것, 그리고 고부간의 사이가 나빠지고부터는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대놓고 싫어하셨다.


아이들이 내 옆에 와서 수다를 떨다가 잠들려고 하면, 벌컥 들어와서 "우리 강아지, 할미랑 자자 할미랑." 하며 손녀를 덜렁 안고 나갔다. 아이들을 외갓집에 데려가려고 하면 장거리 이동에 애들 힘들다며 할미랑 놀자고 못 가게 했다. 


아이들이 내 곁에 몰려와서 색연필로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날, 

"그건 네 엄마 아니야. 어서 할미한테 와! 어서!" 하고 역정을 내는 시어머니와 실랑이를 하다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잡혔다. 뿌리치다가 입고 있던 내 녹색 남방 앞섶이 뜯어졌다. 그 길로 아이들과 집을 뛰쳐나왔다.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남편에게 문자를 했다.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산다고 했다.


남편은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한심하다는 듯이 차갑게 화를 냈다.

어머니와 몸싸움을 했다는 것 자체를 기분 나빠했다. 

옷이 뜯어진 채 집 근처 이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장난감 코너에 가서 구경을 했다. 

아이를 데리고 미용실에 가서 예쁘게 머리를 잘라주었다.


결혼생활은 엉망이었지만 일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시누의 주장대로 '올케가 엄마를 잘 보살펴드리지 못해서 치매 초기가 왔다.'는 걸 증명하듯 시어머니는 막말과 사과를 수시로 반복했다. 남편은 여전히 나를 탓했다.


한 달에 한번 시어머니의 고혈압약을 타기 위해 찾았던 주치의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어머니가 치매가 있으신 거냐고.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같이 사시는 며느님이 잘 아시겠지요. 어르신 모시고 병원에 거의 매달 같이 오시잖아요. 제가 오랫동안 봐 왔지만 어르신이 치매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아닌데요."


치매는 아니었지만 시어머니는 여전히 생사람을 아니 생며느리를 잡았다.

어느 날부터는 부엌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이른 새벽 출근 전에 시어머니랑 아이들 먹으라고 국을 끓여놓았다. 버스시간이 약간 여유가 있길래 주방에 서서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넘기고 출근을 했다.


퇴근을 해서 집에 오니 국냄비는 싱크대에 처박혀 있고 시어머니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오늘도 택배 아저씨가 전화한 건가 싶었다. 


내용인즉슨, 당신이 아무 의심 없이 아침에 며느리가 끓인 국을 먹었는데 먹고 나서 설사가 나고 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몇 번을 화장실에 가고 속이 아파서 거실에서 데굴데굴 굴렀다며 도대체 무슨 국을 끓인 거냐고 다그쳤다.


"안 그래도 네가 국 끓이면서 무슨 가루가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국냄비 앞에 왔다 갔다 하더라. 내가 용케 봤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나는 꿈에도 모를뻔했다. 못된 것, 앞으로 국에다가 독 타넣고 그 짓거리할 거면 주방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하나님이 이번에도 나를 살려주셨어! 나는 하나님만 믿는다."


주방에 갈 수가 없었다. 뭘 만지기만 하면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셨다.

자연스럽게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아이들의 체험학습 도시락을 싸야 하는 날만 주방에서 머물렀을 뿐, 주말에도 식탁엔 늘 시어머니와 남편이 다정하게 대화하며 식사하는 소리만 방에서 들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암수술을 했다. 

건강검진을 처음으로 받았는데 의사가 조직검사를 권했다. 대학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 결과서를 제출하고 담당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초기나 마찬가지였지만 수술이 많이 밀려있어 최대한 빨리 날짜를 잡았는데 그게 3개월 뒤였다.


저녁에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시누가 전화를 했다.

왜 그렇게 경솔하게 덜컥 수술 날짜를 잡았냐고 했다. 스케줄이 밀려 있어서 최대한 빨리 잡은 건데도 몇 개월 기다려야 된다고 하니, 하나님께 기도드려서 물어봐야 하는 거고, 응답을 어떻게 주실지 기다려야 되는 것 아니냐고, 뭐가 그렇게 급해서 날짜를 잡고 오냐고 핀잔이었다. 대단한 병도 아닌데 호들갑을 떤다고 보였을까...


암을 떼어내고 나니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시가 쪽 대가족이 명절마다 우리 집에서 1박 2일을 지냈지만, 수술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더 힘들었다.

남편에게 sos를 쳤다.

"내가 몸이 힘들어서 그래. 가까운 당신 누나 집에서 이번 명절 지내면 안 될까? 그 대신 음식은 내가 다해서 가지고 갈게."

당연히 남편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가 수술한 걸 알면서도 시가 사람들은 늘 그랬든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결혼하고 명절마다 늘 부엌에서 밥상, 술상, 과일상, 후식을 차려날랐던 나는 더 이상 주방에 있지 않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남편이 술김에 가족들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집사람이 요즘 정신과 다니면서 우울증 약 먹고 있어. 가족들 만나는 거 힘들대."


난리가 났다.

우리 때문에 우울증인 거냐고, 그럼 나도 우울증이겠다, 우리는 뭐 할 말이 없는 줄 아냐는 말들이 술상에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이 친절하게 나에게 알려주었다. 참 정직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이 그럴수록, 몸이 아플수록, 마음이 지칠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남편은 성인이 되어 한 남자로서 가정을 꾸렸지만 나와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마음조차 전혀 없음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시가 사람들을 계속 감당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순종하지 않는 아내가 이상했고, 자신의 생각대로 직장을 때려치우고 앞치마를 두른 채 남편 오는 시간에 맞춰 된장찌개나 보글보글 끓여내며, 어머니에게 대리 효도해주는 여자가 필요하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더는 결정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이 되자 항우울제도 끊어졌다. 정신과 약을 끊는다는 건 어쩔수 없는 환경에서 무기력하게 약에 의존해 머물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였다. 이제는 정말 이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제외시킬때라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티끌의 미련도 없었다.


미련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 표현대로 '이 집안에 들어와서' 남편 사랑 못받으며 시어머니 치매나 걸리게 한 올케, 아내, 며느리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할수 있는 건 다했다.


그래 너희들끼리 잘 살아. 이제는 정말 지겹다, 역겨워.

유일하게 걸리는 것 하나.

아이들을 어떻게 데리고 나갈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아이들을 두고 내가 떠날 수 있을지에 대한

선택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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