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Sep 22. 2020

그럼에도 이혼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이혼 후 이야기 #. 12

내가 이번에 출장을 가서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거기 아무개가 하는 말이 김 과장이 이혼했다는 거야. 사실 아니죠? 나는 그 말 듣고 깜짝 놀랐잖아.


직장에서 세미나가 있었다. 

나는 일주일씩이나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하고, 사무실에 남아서 업무를 하고 있었다.


같은 업무들을 하는 사람들이라 얼굴을 알기도 하고, 이름만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대화 속에 내가 등장했던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냐고, 직장 때문에 떨어져 있는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난 말했지. 아니죠, 김 과장? 사람들이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들었나 봐. 그렇죠?"


소문의 당사자인 나에게 '아닐 것이다.'라는 말을 힘주어 반복하면서도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퇴근하면 아이들을 케어한다는 명목으로 번번이 회식자리를 거절하며 직장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어린아이들을 두고 스트레스 풀겠다고 술잔을 부딪힐 이유도 없었고 직장에서는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칼같이 업무만 했다.


아이들을 전국으로 혼자 데리고 다니면서 일하는 나에게 뭇사람들의 시선은 늘 부담스러웠다. 동료들은 농담 삼아 '3대가 복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주말부부'라며 본 적도 없는 내 남편을 부러워했다.


이혼했다는 사실에 당당하라고, 이제 옛날처럼 이혼이 죄가 되거나 쉬쉬하는 세상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물론 이혼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이혼하기까지의 과정을 두 번 겪으라면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애당초 백배는 나을 정도로 이혼은 나에게 오랜 세월 인내와 눈물과 뼈아픈 결정을 섞어 만든 왕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 이혼했어요. 그래서 뭐 피해 준거 있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나에게 쏟아지는 '호기심'과 

'배려를 가장한 소외'나 '

원하지 않는 특권'은, 

이혼했다고 해서 불쌍하게 업혀가려는 생각이 단 하나도 없는 나에겐 부담스러운 사탕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남자 동료들의 시시껄렁한 농담을 듣고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빙그레 웃지만 더욱더 내 모습을 숨길수밖에 없었다.


"시장 뒤편 치킨집 여자 사장 알지? 거기 이혼했대. 아들 하나 혼자 키운대. 많이 외로울 텐데 말이야."


"여자가 삼십 대인데 남자 없이 혼자 사는 거는 말도 안 되지. 남자가 그리울 거야."


"옆 부서에 박주임 있잖아, 노총각인데 거기랑 엮어주자. 뭐 어때, 서로 외로운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안 그래?"


"어디 돌싱 없나. 애 딸려도 좋으니 직장 있는 여자나 있으면 같이 벌고 참 좋잖아."


내가 이혼을 했다고 밝히면 남자들은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술안주를 올려놓을 참이었다.

얼마나 말하기 좋고 쉽겠는가.


회사에서 늘 연기를 했다.

똑소리 나게 아이들을 키우고, 맞벌이라 버는 것도 넉넉하고, 둘 다 정년이 보장되어 있으니 노후조차 걱정 없는 속 편한 여자가 되어야 했다.


우울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우는 것도 참아야 했다. 

눈이 부어서 출근하면, 안색이 초췌해서 출근하면 뭔가 빌미를 주는 것 같았다.

화장으로 얼굴빛을 가리고 강단 있는 말투와 행동으로 늘 그 사람들만큼 앞서 나가야 했다.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직장을 다녔는데, 전남편이 예전에 우리 회사에 와서 가정생활이 순탄하지 못하다고 하소연한 것이 이유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한 명에게만 털어놓은 내 사정이 전달이 되어 퍼져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그 사람은 날 한 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한대요? 참 웃기시네, 자기는 퍽이나 결혼생활이 행복한 모양이죠? 정확하지도 않은 말들을 퍼뜨리기나 하고!


평소보다 과하게 흥분하고 말았다.

머쓱해진 그 사람은 자리를 피하면서도 유난히 크게 화를 냈던 내가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아,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이 쓰렸다.

가족 이야기는 최대한 피해 가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늘 남편에 대해 물어오면

"우리 남편은요~"하며 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남편이 없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내 모습을 숨기고 연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냥 속 편하게 내지르면 될 거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혼했다고 하면 내가 이혼녀가 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들이 '아빠 없이 엄마손에서만 크는 아이들'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남편분은 못 오시고 대신 계약하시는 건가요?"

"바깥 선생님께서는 언제 오시나요?"

"세대주분께서 직접 신고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사를 다니면서

전세를 계약하고 아파트 관리소에 이사 신고를 하고 주민센터 전입신고를 하면서 수없이 들었고 나는 그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제가 계약자입니다."

"제가 보호자인데요."

"제가 세대주입니다."


아이 고등학교를 전학시키면서 교육청만 세 번을 갔다.

아이 아빠가 없다면 기본증명서, 가족관계 증명서를 갖고 와야 학교 배정이 된다고 했다.

내가 우리 아이의 엄마가 맞음을, 아이 보호자가 맞음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빠 부재의 근거를  떼와야 했다.


"... 아 그래요?"

편견보다 무서운 건 의아하다는 표정의 되물음이었다.



작은 아이를 데리고 배정받은 중학교에 담임선생님을 뵈러 갔다.

"어머님, 비상연락망에 아버님 연락처는요?"


아이의 보호자는 나밖에 없었다. 같이 살지도 않는 전남편을 비상연락망에 올릴 수는 없었다.

멈칫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려는 찰나, 옆에 있던 작은 아이의 대답이 불쑥 치고 들어왔다.


"XXX-XXX-XXXX이요!"


아이는 안다.

엄마가 아빠 핸드폰 번호를 모른다는 것을.

문자로만 필요한 대화를 하기에 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선생님 물음에 엄마가 당황했고 

이내 속상할 거라는 것을...


전학을 간 학교에서

그렇게 아이와 나는 무사히(!)

아빠가 있는 학생이 되었고

남편이 있는 여자가 되었다.



집으로 가기 전 아이를 데리고 우체국으로 갔다.
등기 보내는 방법을 알려줄 참이었다.

전학 수속이 끝나면 이전에 다녔던 학교로 보내야 할 서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메일이든 우편물이든 용건만 달랑 보내지 말고 꼭 안부 여쭙는 메모라도 함께 보내야 해, 알겠지?"


아이는 우체국 번호표 뒷면에 꾸욱 꾸욱 눌러쓴 마음을 담아 서류에 동봉했다.


아이들은 이제 열일곱 살, 열다섯 살이 되었다.




이전 11화 이혼했지만 때론 가족이긴 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