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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Nov 28. 2024

겨울과 함께 오는 것

자고 일어나니 밤사이 온 세상이 하얗게 번져 있다. 멋지다는 생각은 잠깐이고 당장에 출근길이 걱정된다. 감상은 스치듯 하고 곧바로 현실로 돌아오는 나를 느끼며 아, 내가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그렇다고 아쉽거나 슬픈 건 아니고 약간 기분이 좋기도 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멋진걸? 30대 같아.' 하면서. 오빠도 내 출근 준비에 맞춰 서둘러 도시락을 싼다. 내가 준비를 다 마치자 현관문을 열고 배웅을 해주는데, 안전 운전하라며 신신당부다. 걱정 안 해도 된다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춤까지 추며 까불었건만, 그 마음은 운전대를 잡은 지 10분 만에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주차장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건 무슨 재난영화도 아니고 수많은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딱 봐도 정시 출근은 불가능할 것 같아 미니에게 전활 걸어 부탁을 한다. 직장에 지각할 것 같으니 상사분들께 말씀 좀 부탁드린다고. 도착 시간은 됐으니 이제는 잘 가는 게 문제다. 억지로 조금씩 나아가다, 이윽고 만난 오르막길에서는 바퀴가 헛돌고 차가 계속 미끄러지고 만다. 나를 포함한 여러 대가 그러고 있으니 사고가 날까 두려워 완전히 패닉에 빠지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비상깜빡이만 켜고 허둥지둥하는데, 나를 보내곤 집에서 걱정하고 있던 오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우선 엑셀은 아주 살살 같은 속도로 밟고, 좌우로 핸들을 살짝씩 흔들라고 조언한다. 그 말을 듣고 침착하게 해 보니 드디어 핸들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공포의 오르막을 벗어나자 이상한 용기가 생겨 "이 정도면 언덕 지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중얼거리니 오빠가 절대 안 된다며 갓길에 주차를 하란다. 이성을 되찾고 생각해 보니 내 목숨보다는 차를 버리는 게 천 번 만 번 맞는 것 같아 차를 세우고 한숨을 돌린다. 하늘인지 제설 상황인지 이 날씨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k-직장인의 설움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욕도 시원하게 뱉었음). 곧이어 오빠가 말한다. "잇다야, 택시 잡혔다. 지금 있는 골목만 나오면 돼. 위험하니까 큰길에서 기다리고 있어. 기사님 하고 연락해 보고 있을 테니까 조심히 내려가, 알겠지?" 사실 자기도 출근 준비를 하느라 바쁜 시간인데, 내 전쟁 같은 출근길을 함께 걱정해 주고 있었던 오빠다. 그렇게 가방에 우산에 도시락까지 싸들고는 칼바람과 거센 눈발을 헤치고 무사히 택시를 탄다.

따듯하고 고요한 택시 안. 이제 살았다 싶어 온 마음이 놓인다. 기사님은 나와는 달리 힘든 기색, 어려운 기색 하나 없이 부드럽게 운전하신다.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여쭌다. "기사님 혹시, 눈 위에서 바퀴가 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방금 오르막을 오르다가 자꾸 미끄러지길래 그냥 골목에 차를 버리고 왔어요.." 기사님께서는 한바탕 웃으시더니 이렇게 답한다. "일단 오르막에서 멈추지 말고, 한 번에 가야 해요. 그리고 아주 낮은 속도로 주욱- 미셔요. 그럼 올라가요. 그런데 오르막보단 내리막이 더 위험해요, 그럴 때는......" 이후로도 블랙아이스나 눈길 대처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베테랑의 노하우를 열심히 귀담아듣는다. 30분이 넘게 달려 직장에 겨우 도착하는데, 왜인지 험난한 여정을 함께한 듯한 동지애가 느껴진다. 동시에 큰일 날 뻔한 상황에서 구해주신 것 같은 감사함도 든다. 이 눈길에 안전하게 운행해 주셔서 감사했다며 현찰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운전 실력도 없는 와중에 돈까지 없다. 이럴 때 지갑 사정이 넉넉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목소리에 진심을 가득 담아 인사하고 차문을 적당한 세기로 닫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벌써 세 사람, 아니 여러 사람(제설해 주신 분, 공무원 등)의 도움을 받아 출근을 마친다. 아침부터 스펙터클한 일을 겪어서인지 정문에 들어서는 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출퇴근의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 출근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퇴근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아침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택시에 오른다. 기사님을 뵙자마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와다다 수다를 떤다. 기사님과 죽이 척척 맞아 그렇지, 맞아요, 이랬어요, 저랬어요 만담이 펼쳐진다. 문득 우리 아버님께도 이렇게 친근하고 사근사근한 며느리 같으면 참 좋을 텐데, 왜 막상 어머님 아버님한텐 그런 게 어렵지 잠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다 아침에 뵀던 기사님처럼 <눈길 운전 대처법> 강의에 귀를 기울인다. 오빠가 말했던 방법, 아침 기사님의 방법, 저녁 기사님의 방법이 모두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낮은 속도를 강조한다. 그것만 밑줄 쫙, 돼지꼬리 땡땡만 해도 위험한 상황에서 잘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이제 길가에 내다 버렸던 내 차에 거의 도착한다.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뒤태다. 내 차의 궁둥이를 보고 기사님과 내가 동시에 말하곤 또 동시에 웃는다. "잘 있네??" "잘 있네요??" 우리의 말에 장시간 홀로 있었던 차에 대한 기특함이 담겨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택시에서 내리지만 이번엔 팁까지 드리고 싶진 않다.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는 동시에 기사님들 특유의 '요즘 젊은것들'에 대한 한탄도 꽤나 들어줬으니까. 쌤쌤이다. 그래도 감사하다.

다시 낡지만 작고 소중하고 귀여운 내 차에 오른다. 차를 버린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빠가 서있다. 혹여나 나 혼자 갓길을 빠져올 때 위험할까 싶어, 대신 차를 빼주려 눈을 푹푹 밟으며 걸어온 오빠다. 아이고. 다정함과 다정함과 세심함 속에 무지하게 길었던 출퇴근길이 마무리된다. 걱정으로(혹은 욕지거리) 시작한 하루 끝에, 사랑과 감사함이 남았다.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건 멋들어진 눈꽃도 삐까뻔쩍한 차도 아닌 그저 사람일 뿐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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