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시간이 쌓인 빈 월급봉투
우리 엄마는 올해 71살이다. 엄마차는 스타렉스 밴'
아빠가 실내인테리어 도장일을 하셔서 아빠의 짐들을 싣고 아빠를 모시고 다니셨다. 엄마가 그 일을 함께 하신 건 아니고 아빠를 면허증을 못 따게 해 버린 엄마의 평생 업보였다.
걱정이 많던 엄마는 그 옛날 혹시나 아빠가 술 드시고 운전이라도 하실까 봐 면허증을 아예 따지마라고 엄포를 놓으셨었고 그게 엄마의 발목을 잡게 될지 그땐 절대 알 수 없었겠지.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유배달을 하셨다. 정확히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엄마께 여쭤본 적은 있었지만 그걸 기억해야 하는 의미를 느끼지 못했었나 보다.
새벽 4시면 엄마는 우유배달을 나가셨는데 내가 고등학교까지도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셨고 , 우유 물량이 줄어들면서부터는 굵직한 몇 군데에만 차로 배달을 하신다
40년을 정말 열심히, 아니 열심히가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로 쌔빠지게! 일하셨다.아니 하고계신다.
자전거로 배달하던 그때는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무거운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두 박스씩 뒤에 실어서 배달을 다니셨고 집에 돌아와선 우비 속 젖어버린 지폐들을 꺼내 한 장 한 장 수건 위에 펴 말리시곤 했다.
엄마 몸부터 말리고 쉬었어야 했을 텐데 혹시나 돈이 조금이라도 못쓰게 될까 봐 그랬을까?
그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장화 속에 빗물이 들어와 양말도 젖고, 우비를 입었지만 머리가 다 젖어있었던 엄마. 그럼에도 한 번도 힘든 표정을 지은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네.)
훗날 우리 남매가 어른이라는 탈을 쓸 무렵 시작된 사고들을 자신 탓인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며 속상해할 때 처음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았었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힘들다 하지 않았던 엄마는 자식들 문제엔 한없이 풀이 죽었다. 그게 본인 탓이 아닐터인데 아직도 엄마는 '내가 잘못 키워 그렇지'하며 눈물을 훔치신다.
그런 엄마의 서랍엔 켜켜이 쌓인 가계부와 함께 엄마의 청춘이 고스란히 환산되어 있는 월급봉투가 있다. 왜 버리지 못했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엄마 인생에 그 찬란하고도 어여뻤던 나이의 시간값이 그 봉투에 있을 테니 더없이 소중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지금까지 번 돈이 얼마나 될까? 그걸 그냥 돈의 가치로만 환산할 수 있을까?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이 자식들한테 헌혈하는 마냥 다 빼주고, 탈탈 털린 그 봉투들만 간직하고 있는 엄마 마음이 아프다 못해 또 화가 난다.
엄마가 쉬었으면 좋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크게 없다. 결혼 전이라면 내가 벌어서 용돈도 드리고 쉬시라고 하겠지만 난 전업주부이다. 남편 혼자 외벌이로 벌어서 집, 차 대출금을 갚고 세 식구가 한 달 살면 그것마저 마이너스다.
작년 말부터는 그나마 소소하게 드리던 용돈조차도 드리지 못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엄마한테 이제 그만 쉬시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딸이 건강하지 못해서 엄마는 또 애가 탄다. 딸 형편이 어려울까 우리 집에 오면 이제 눈치도 본다.
내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 틱틱거려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일을 쉬면서부터는 엄마가 내 형편을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짜증 난다. 왜 엄마한텐 미안하고 안쓰럽고 아픈데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걸까?같은 여자로써 더 잘 알면서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건 오래된 꿈을 이루고 싶은 것도, 그냥 글 쓰는 게 좋은 것도, 글로써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있지만 언젠가 내 글들로 (이글의 주인공은 엄마이니까) 돈을 번다면 엄마를 호강시켜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엄마의 껍데기만 남은 월급봉투와 가계부를 엮어 엄마의 시간을 사서 돈으로 셀 수 없는 그 가치를 돌려드리고 싶다.
꼭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