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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Sep 06. 2017

비행기 안에서:경계의 흑해.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

오랜 시간의 비행은 시간을 잃어버리게 한다. 시간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손목시계의 시각이 몇 시인지 맞추는 일이 제법 신경 쓰인다. 비행을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는지 머릿속으로 계속 셈을 한다. 현지 서울 시각이 몇 시일지 습관적으로 계산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주관적인 시간은 만들어지고 또 기억된다. 정주하는 삶은 시간에 의해 살아가지만, 이동하며 여행하는 삶에는 시간이 없다. 해가 떠 있고, 해가 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 현상 안에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므로. 그래서 돌아와서야 생각했지만, 여행지에서의 현지시각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참신한 코스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 여행지에서 현지시각으로 이동시간을 계산하고 궁극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날짜와 시각을 계산하며 서울 현지시각으로 제자리를 찾는 것이 제법 고단한 일이라는 것도 말이다.


아부다비에서 출발한 비행기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담요를 덮고 비행기의 굉음을 견디며 묵묵히 지나고 있었다. 잠을 청해보았지만 현지 시각으로 이미 낮시간이어서 그럴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간간히 승무원은 승객들이 필요한 것들을 전해주려 다니고 있었고, 오랜 비행으로 지루해진 승객들이 기내를 산책하거나 화장실을 드나들곤 한다. 다들 별 말도 없다. 비행기는 때로 난기류에 흔들리기도 했고 그때마다 좌석벨트 표시등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지칠 무렵 제공되는 기내식은 그나마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시간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루마니아 혹은 불가리아 해변의 흑해


비행한 지 4시간 이상이 지났을 때 우리 눈에 펼쳐진 것은 흑해였다. 흑해! 흑해 위를 날고 있다니.

감각이 무뎌지는 오랜 비행시간 동안 때문에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느꼈던 긴장과 기대는 온대 간데없다가 흑해를 상공에서 바라보며 다시 들뜨는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였다. 여행이 주는 긴장과 기대는 즐겁게 받아들여지다가도 금방 피로함을 가지게 되는데, 다시 긴장으로 유도하는 것은 내가 무언가에 속하고 있다는, 혹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내가 무언가가 되고 있다는- 결국 그 나 스스로 인식할 수 있을 그때이다.


여행은 어딘가로 떠나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새로운 것을 접할 때가 아니라
여행하고 있다는 나 자신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순간에서야 성립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티 없는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고 있었다. 해변을 끼고 이웃으로 접하고 있는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느끼며 남은 비행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발을 디딘 곳이 여행이 아니라, 이미 인식하고 있는 그 순간에 흑해를 보면서 거울을 한번 보게 된다. 괜히 화장을 한번 해보기로 한다. 아직 비행시간이 한 시간 이상 남았음에도 한참을 들썩이게 된다. 경계를 지난다는 것을 제법 진하게 느끼던 그 첫 순간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지나면서도 나는 제법 많은 국경이라는 경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고 보면 나는 경계에 서 있는 그 무언가에 언제나 제법 오랫동안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시인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랬던 걸까.

+ 흑해를 지나 동유럽으로 막 들어와 비행 중에 발견한 모습. 구불구불한 강과 불규칙적으로 잘린 농토는 퀼트 조각처럼 정겹다.



* 장소 : 아랍에미레이트 아부다비에서 독일 뮌헨으로 가는 에티하드 항공기 안에서 흑해와 동유럽 일부 국가 상공 위.
* 사진, 글 : 나빌레라(navill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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