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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May 24. 2024

사치

쓸모없이 주고받는 당신과의 농담을 좋아한다.

6월에는 분홍색 작약 꽃다발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 발매된다는 임윤찬의 LP 앨범을 예약하려 생각하니 기뻤다.

당신의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으며 ‘잘 생겼다’ 하는 시간이 좋다.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을 것을 사는 일을 사치라고 한다면, 쓰지 않아도 될 마음을 쓰고 있는 게 사치라면, 나는 매일이 사치롭길 원한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김희성이라는 인물에 가장 호감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달, 꽃, 별... 이런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는 틈이 보인다. 그 틈으로 사랑과 기쁨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 나온다. 사랑과 기쁨은 이유를 동반하지 않는다.


정진되어야 하는 잘 잡힌 균형감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때로 이유 없는 웃음과 장난을 할 줄 아는 실없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 사람이 가장 사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꽃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나뭇잎의 연두색에, 당신의 시답잖은 농담에, 나의 존재를 실감한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생활'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실감하는 '순간'. 그래서 나 자신을 오롯이 '현재'에 붙드는 순간. 나는 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경험한다. 나는 그때 가장 사치롭다.


영원을 경험하는 사치가 생활에 잡아먹히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기념일에는 잘 먹지 않더라도 예쁜 케이크를 산다. 공간과 나를 구별하고 나 스스로를 알아채는 향수 취향을 찾는다. 좋은 사람이 집에 오면 샴페인을 따려고 한다. 코르크가 병에서 분리되는 경쾌한 소리는 대체될 수 없는 기쁨이다. 안다고 해서 성과급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클래식을 들으며 시간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집에 사 둘 수 없어도 한참 서서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취향의 그림이 있으면 또 어떨까.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사치는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의 마지막 내용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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