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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기 전의 산, 대피소의 아침.

소청대피소에서 하산합니다.

by 경계선

사람들 돌아누울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 비상구를 가리키는 아스라한 초록빛, 그리고 들리지 않지만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 나무둥치처럼 딱딱해지는 허벅지와 구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무릎 관절. 피곤했던 산행 뒤였다. 뒤척이다 사람들의 부스럭거림에 깨어 눈을 떴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겨우 새벽 3시 반 정도. 아마도, 일출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짐 꾸리는 소리일 것이다.


대청봉은 이곳에서 한 시간 반 거리.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배낭을 꾸린다. 대피소에 오는 이유 중에 하나도 정상에서의 일출을 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의 소리에 잠은 깼지만 노곤한 몸은 일으켜지지 않았다. 옆자리에 누운 남편의 숨소리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시간을 보냈다. 별빛을 상상하며, 깜깜했던 눈 위의 길, 먼데 보이는 속초 바다, 서로를 쳐다볼 때마다 서로의 얼굴에 비추는 헤드랜턴 불빛.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까무룩 다시 잠든 것 같다.


대피소 안은 약간 어둑한데, 본격 점등은 대략 아침 7시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인원은 아침 9시 전에 퇴소해야 한다.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만실이었던 대피소 인원들 중 남은 사람은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5명이 채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모두 일출산행을 갔거나, 하산을 시작했거나. 어쩌면 우리는 산 위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들이었다.

"잘 잤어? 몸은 괜찮아?"

동시에 서로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생각보다는 좀 힘드네."

"딱딱한 바닥은 역시 쉽지 않군."

"다리가 말을 안 들을 것 같아."

"그러게. 큰일인데."

"대청봉은 어려울 것 같고, 아침 먹고 난 뒤 바로 하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굳은 몸을 일으켜 작은 통나무집인 대피소 안에서 취사장으로 향했다. 햇반과 간단한 반찬, 그리고 따뜻한 국물이 필요할 것 같아 라면을 끓였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그 밤의 소청대피소의 형체를 이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IMG_2104.jpg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풍경


산맥들이 흰 눈 덕분에 선을 굵게 그렸다. 이왕 하산하는 길이니, 느긋하게 드립백으로 내린 커피 한 잔까지 누렸다. 눈에 덮인 풍경을 보며 커피잔을 들고 있는 이 시간, 무거운 다리와 달리 머릿속은 청량했다. 무겁게 이고 지고 온 버너와 코펠이 이렇게 낭만을 선사하게 되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알루미늄 컵에 내린 뜨거운 커피의 온기는 뱃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설악의 공기와 섞였다. 그리고 그 맛과 향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제가 설악산에 다닌 지 십수 년이 넘어가는데, 이렇게 많은 눈이 온 건 처음 봅니다."

"저는 설악산만 와요. 언제 와도 산의 모습이 늘 다르거든요. 그리고 늘 한결같고요."

커피를 손에 쥐고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김을 내뿜던 우리 부부와 소담한 이야기를 나누다 먼저 하산하신 지긋한 나이의 남자분이 해 주신 말씀이었다. 설악산을 오래도록 사랑해 온 사람 같았던 남자분은 백담사 방향으로 길을 잡아 가파른 내리막길로 한 두 걸음 잡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어떤 시간 뒤에 오는 기억은 때로 나른한 육체적 고통 뒤의 상쾌함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기억의 선이 굵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선 굵은 기억들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일이 산을 오르는 길 같다. 코 끝 시린 채로 한참 동안 먼 곳을 응시했다. 이 정도의 풍경이라면 코인 티슈에 물을 적셔 대충 닦은 고양이 세수나, 생수로만 가글 한 양치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나는 씻지 못하는 것과 깨끗하지 못한 화장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굵은 선의 설악산은 내게 삶의 우선에 무엇을 놓고 있었는지도 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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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씨의 하산길.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대청봉을 다시 오자고 다짐하며 왔던 길을 되잡아 하산을 준비했다.

다시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려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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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기후위기로 설악에 너무 많은 눈이 내린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그 해의 설악산에는 눈이 많이 왔다. 그리고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겨울에도 그리될 것만 같아 조금은 걱정도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 겨울 설악산의 산양(천연기념물) 중 제법 많은 수가 먹이활동을 하지 못하고 눈에 갇혀 죽을 정도로 위험한 적설량이었다는 내용은 설악산에서 내려온 후 한 달 정도 더 지난 후에 알게 된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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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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