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설악산 소청 대피소로 향하는 길.
산에 더 오래 머문다는 것은 자연을 더 오래 알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나를 조금 더 알아가는 일일까.
종일 걷고,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 대피소에 도착해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다시 산을 걷는 일. 그리하여 1박 2일의 산행을 시도해 보는 일. 우리에겐 다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정말 설악산은 산속에 또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불동으로 올라갈 때 보았던 양폭 대피소와 희운각 대피소. 한계령에서 시작해 서북능선을 걸어 소청봉 근처에 있는 소청 대피소와 지금은 공사 중인 중청 대피소. 백담사에서 올라 봉정암을 가기 전 만나는 수렴동 대피소. 설악산에는 산객들을 위한 대피소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는데, 그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좀 더 오래 산에 머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무시무시했다. 높은 고도의 봉우리 근처이거나 깊은 산속에서 "대피"를 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서 이용할 곳이 아닐까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다. 작은 야산 정도에서 만들어질 리 없는 "대피소"라는 곳은 깊고 큰 산에 오래 안기려는 산객들이 잠시 잠드는 곳이었다.
숙박시설이 아니다. 그래서 여긴 딱딱한 마룻바닥의 좁은 칸에서 쪽잠이라도 자며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고, 버너와 코펠을 짊어지고 올라온 산객들이 밥 끓여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위급하고 긴급한 것들을 수혈하듯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은 즉석밥, 생수, 이소가스(또는 부탄가스)와 같은 말 그대로 생존에 필요한 것들만 가능했다. 세수와 양치도 허용하지 않는 곳, (당연하지만) 푸세식 화장실 정도라도 감지덕지하게 되는 곳. 그런 곳이 "대피소"이다. 산 안에서 산을 해치지 않는 방법으로 이틀 혹은 그 이상을 산에서 머무르려는 사람들을 위한 곳. 우리는 그 대피소에서 1박을 하며 촉박하지 않은 산행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대피소 예약도 쉽지 않거니와 1박 2일로 산행을 하면 배낭이 매우 무거워졌다. 당일 산행이라면 생각지 않았던 버너와 코펠, 딱딱한 마룻바닥에 조금이라도 몸을 편안히 누이기 위해 필요한 매트, 무엇보다 1박 2일간 먹어야 할 식량(!)의 양은 제법 많았다. 배낭에 짐을 꾸리는 것만 1시간은 족히 걸린 듯했다. 게다가 겨울 산행이라 옷의 무게가 상당했다. 특히 쉴 때 체온 조절을 위해 필요한 두꺼운 다운재킷(우모복)은 아무리 가벼워도 500g이 넘었다. 짐을 꾸릴 때 챙긴 물품들을 하나씩 손에 쥐어볼 때는 100g, 200g 정도이지만, 가방에 넣고 들쳐 매니 만만치 않았다. 배낭을 꾸려 대략 무게를 재보니 9kg가 조금 넘었다. 아, 겨울의 1박 산행은 고행일수도 있겠구나.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하염없이 쏟아진 이틀 뒤였다. 설악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풍경을 구경하며 한발 한발 딛다 보니 배낭의 무게도 견딜만했다. 소공원에서 시작해 천불동으로 오르는 길, 우리는 소청대피소를 예약했다. 이미 여러 번 설악산을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천불동을 지나 희운각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천천히 올라도 소청대피소까지 시간은 넉넉해 마음이 푸근했다. 기상 예보로는 눈이 1m 정도 쌓였다고 했지만, 그것보다 더 쌓인 걸로 보였다. 일부 구간은 데크나 철제 구조물이 끊어지기도 했다고 들었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등산로는 등산로의 위험은 없었지만, 철제 다리로 지나가는 구간에 눈이 철제 난간까지 쌓일 정도로 위험한 구간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도 오늘 바로 하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우리를 들뜨게 만들었다. 눈 덮인 설악산을 드디어 내 발로 올 수 있게 되었다는 만족감은 너무도 컸다. 위험한 구간에서는 특히나 더 느긋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걸으며 오히려 눈을 감상했다. 너무 마음을 놓았을까. 편도 10km 정도의 구간이고, 대략 5-6시간 정도면 가능할 것이라 예상했던 산행이었다. 소청대피소에 도착 시간은 중간에 점심식사를 하고 도착해도 대략 오후 3시 정도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 그래서 출발도 늦었다. 오전 10시 정도에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눈길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천불동 계곡을 걸을 때까진 괜찮았다. 희운각 대피소를 지나 고도를 높이 올리는 순간부터, 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겨울, 등산객도 거의 없는 길.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등산로가 겨우 보일 정도였다. 발을 딛는 순간마다 미끄러졌다. 원래는 삐뚤빼뚤한 돌계단이었을 길이 이제는 눈에 다져져 비탈처럼 변해 있었다. 아이젠을 땅에 힘껏 찍어도 소용없었다. 눈이 곱게 바스러져 박히지 않았다. 한 걸음 나아가면, 두 걸음 미끄러졌다. 저 멀리 누군가가 하산하는 분이 계셨다. 걸어 내려온다기보다 눈을 밀면서 천천히 미끄러져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살짝 비켜섰다.
"안녕하세요."
"어디까지 가세요?"
"소청대피소요. 지금 길이 계속 이런가요?"
"네. 아, 아직 한참 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얼마나 더 걸릴까요?"
"지금부터도 1시간은 더 가야 해요. 이제 곧 완전히 해가 질 텐데. 체력은 괜찮으세요?"
"아... 아직 체력은 괜찮은데... 길이 너무 미끄럽네요."
"... 지금 하산하시는 걸 권유드립니다. 지금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는데... 길이... 너무 미끄러워요."
"아, 그 정도예요? 그렇지만 저희는 희운각대피소에 예약을 안 해서요."
산에서 만난 처음 보는 사람은 인사를 건네며 우리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렇지만 왜 그랬던 건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편과 나는 헤드랜턴을 꺼냈다. 한 발씩 가다 보면 끝은 있으리라. 우리를 스쳐갔던 그 산객은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우리에게 핸드폰 배터리는 충분한지까지도 확인해 주었다.
뒤돌아 희운각 대피소를 멀리 내려다보았다. 눈에 소복이 쌓인 대피소로 다시 하산할까, 부지런히 걸어갈까. 우리는 체력을 믿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산그늘 풍경은 1박 2일 산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겐 허락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조금씩 체력이 고갈되고, 멀리 보이는 속초 앞바다와 도시의 불빛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찬 바람이 모자 안 머리를 시리게 했다. 초코바를 하나 꺼내 베어 물었다. 얼어버린 초코바는 모래알처럼 서걱였지만 우물거리며 어떻게든 씹어 넘겼다.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위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우리 두 사람의 해드랜턴만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더 걷는 건 괜찮겠어? 몸은 좀 어때?"
서로 같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 아직은 더 갈 수 있어."
남편의 휴대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천만다행인 건 발가락과 손가락이 얼지 않았다는 점일까.
"OOO 씨죠? 소청 대피소입니다. 지금 오고 계세요? 어디쯤이세요?"
예약된 사람이 대피소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은 대피소 직원 입장에서도 걱정스러운 일일 것이었다.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희운각 대피소에서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말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피소 직원은 별 문제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 오실 수 있겠네요. 조심해서 오세요."
나는 직원의 대답에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었다. 에너지바와 살얼음이 된 물을 마시고, 미끄러질지언정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전화를 끊은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아 드디어 오르막이 끝났다! 그리고 나타난 눈앞의 이정표!
이 이정표는 소청봉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이 이정표에서부터 소청대피소까지는 제법 급한 경사를 400미터 정도 내려가야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우리는 이제야 "너무 무서웠어." "죽는 줄 알았네." "아까 하산했어야 했나 싶었어." "밤에는 헬기도 안 뜨는데..." 이런 말들을 내뱉었다. 나름의 긴박한 순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던 심경들을 재잘대며 미끄러운 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몇 번의 엉덩방아와 눈앞에 보이는 소청 대피소의 불빛에 웃으며 말이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버너와 코펠을 주섬주섬 챙겨 삼겹살을 코펠 위에 올렸다. 햇반을 돌리고, 집에서 싸 온 김치를 꺼냈다. 온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우리 두 사람은 제법 오래 웃었다. 삼겹살이 치익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밥과 고기를 뱃속으로 밀어 넣고 차가운 공기 속 쏟아지는 깜깜한 하늘의 별을 보았다. 눈 속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대피소는 산속에 있지만, 실은 우리가 오르내리는 수많은 길 사이에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그곳이었다. 끝없이 오르고 미끄러지며, 때로는 겁이 나 멈춰 서기도 했던 그 모든 순간이 결국 다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날 밤 대피소의 불빛이 실은 하늘의 별빛보다 더 간절했던 것 같다. 산 정상의 밤하늘에서 보려 했던 별빛보다 대피소의 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