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봉정암, 그리고 천불동 계곡.
한번 매료된 산에서 마음을 거둘 방법은 없었다. 설악은 나에게 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가보지 않은 등산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다시 산으로 기울었다. 가보지 않은 등산로를 하나씩 더 탐구해 보는 마음이 조금 더 진해질 수 있었달까. 그렇지만 한여름의 날씨와 싸우는 산행은 쉽지 않았다. 비켜갈 수 있으면 맞서지 않는 것이 나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 내게 여름의 산은 싱그러운 생의 에너지에 질식당해 죽기 딱 좋을 곳 같았다. 게다가 여름의 설악산은 몇 번의 폭우, 몇 번의 폭염주의보 등으로 입산이 통제되기도 했기에 좀처럼 발길을 내지 못했다. 아직은 등산초보이기에 더욱 틈을 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름의 열기가 식어갈 즈음, 바람은 달라지고 구름의 결도 바뀌었다. 그렇게 가을이 왔다. 우리는 등산화를 점검하고 배낭을 꺼내 먼지를 털면서 산악날씨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가을, 산에 가기 가장 좋을 때다. 더위가 물러간 허공은 높다란 하늘이 자리를 차지했다. 하늘이 높으니 산은 더 깊어진다. 그리고 비로소 설악에 단풍의 빛이 내리기 시작한다. 고지대부터 시작되는 단풍은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물감 때문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대청봉에서부터 시작되는 단풍은 찬찬히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끝없이 흩뿌린다.
공룡능선 다음으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곳은 용아장성이라고 불리는 능선이다. 이곳은 탐방이 금지된 구역인데, 보기만 해도 혀를 내두를 뾰족함을 자랑한다. 말 그대로 용의 이빨이 성처럼 둘러쳐 있다는 느낌. 산은 나에게 용아장성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이쯤 되면 산행의 목적이 '설악에 대한 궁금증 해소'로만 좁혀지는 듯하다.^^;)
당일의 일정으로 기나긴 등산길, 왕복 25km 정도가 되지만 설악산 내에서는 비교적 등산로가 순탄한 편인 "백담사 코스"로 발길을 잡았다. 바다가 보이는 속초 방향이 아닌 강원도의 내륙인 인제군에 걸쳐 있는 설악산의 모습이다. 백담사에서부터 시작하는 등산로는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 오른다. 그리고 거기서 더 오르면 대청봉까지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는 봉정암까지만 오르기로 했다. 수렴동이라고 불리는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물소리와 함께 걷는 트레킹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수렴동대피소가 있는 지점부터 조금씩 고도를 올려 우리의 호흡을 재촉한다. 봉정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용아장성의 모습, 봉정암에 있는 사리탑, 오래된 암자의 호젓함을 기대하며 비교적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을 산행을 시작했다.
공룡능선과 대청봉을 오르던 난도 높은 길에 비하면 순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오르는 도중 갑작스러운 비와 함께 하는 산행은 처음이었다. 바람막이는 방수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재킷이긴 했지만, 부슬부슬 내리던 비와 땀은 재킷 안쪽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운 단풍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선 것은 사실이었다. 여러 걱정도 있었지만 오는 비에 비하면 등산로가 많이 위험하지 않다는 점이 그나마의 다행이었다. 거친 폭포소리와 쉴 새 없는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에 온 정신을 맡기며 찬찬히 한 발씩 올랐다. 묵묵히 걷던 발걸음은 5시간 정도를 올라 봉정암에 도착했다.
오늘의 설악의 풍경은 이것이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좋았을까, 나는 암자의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오래도록 들으며 한참을 희미하게 먼 산을 바라보았다. 바위와 바위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제각기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조화를 깨지 않는 그 신비함을. 그 고요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나만 생각하며 살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와 어울려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나의 자리에서 조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비가 오는 봉정암의 고요, 그 한가운데서 나는 내리는 비를 축복처럼 맞았다.
"이런 풍경도 좋은데?"
"그러게. 날씨가 좋지 않아 용아장성도 잘 안 보지만 말이야."
"산은 어디 가지 않으니까.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산이 어디에 가지 않는다는 말. 당신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내 옆을 지키겠다는 고백처럼, 나는 달콤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에 혼자는 못 왔을 것 같아. 고마워. 이런 풍경도 보여주고."
그날 우리는 단풍보다 더 고운 마음을 주웠다.
운무에 가려 단풍빛이 어른거리던 일주일 뒤, 우리는 다시 설악산 천불동계곡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천불동만을 따라 걷는 비교적 짧은 산행이었다. 천불동 계곡 길의 오련 폭포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길고 긴 철제 계단과 데크. 마주 보는 장엄한 기암괴석의 가파른 곳에 바람에 흔들리는 풀도 아닌 굵직한 나무들이 쭈뼛쭈뼛 서서 바위를 움켜쥐고 있다. 나무들은 바위를 거스르며 자라는 것일까. 아니다. 나무들은 바위가 날아가지 않게 잡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을 보고 다시 보아도, 조화로운 모습에 감탄이 흘러나온다. 무엇이든 감사하게 되는 마음, 무엇이든 긍정하게 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우리 부부가 산에서 주워온 것들이 아닐까.
"산은 좋지 않은 풍경이 없구나. 비가 오면 와서, 바람이 불면 불어서, 그냥, 다 자연스러운 풍경이야. 우리가 처음 볼 뿐이지. 여름에 왔어도 좋았겠지? 그땐 또 다른 모습이었겠지?"
폭우와 폭염의 핑계로 틈을 내지 못했던 우리의 여름을 뒤돌아보며, 만추의 산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햇빛 좋은 날만이 산행하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