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클리셰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휼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내겐 더 이상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편영화 ⌜나의 새라씨⌟는 취향의 스펙트럼에서 크게 끌리지 않았지만, 연출 의도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영화의 메시지가 가슴 깊이 와닿았다.
영화가 독창적인 클리셰나 여운이 남는 메시지를 전달하진 않는다.
서울로 올라가 출세한 주인공이 빈털터리이로 고향에 내려왔다거나, 남편이 외도를 했지만 친구들에겐 사랑꾼인척 거짓말을 한다거나, 누군가는 주인공의 비밀을 알고 갑을 관계가 뒤바뀐다는 익숙한 스토리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용기 있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영화가 끝나는 것도.
하지만 돼지공장이라는 신선한 배경 소재, 차갑고, 우울한 영상미와 뛰어난 연기 실력이 더해 새로운 영화로
탄생했다. 단편영화가 아닌 장편영화라고 느낄 정도로 강렬하게 남았다.
왜 돼지공장일까? 남편 몰래 도망치듯 내려온 고향에서 그녀가 가장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은 친언니가 다니고 있는 공장이었다. 돼지 창자를 물로 깨끗이 씻는 작업은 더러운 것을 만져야 하는 일이 그녀가 처한 상황을 대변해 준다. 서울 사모님이었던 주인공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고 헛구역질을 하는 장면을 통해 곱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상미는 채도와 명도가 낮으면서 파란 컬러를 높여 차갑고, 우울한 느낌을 더했다. 입고 있는 작업복도 하늘색과 흰색으로 공간의 냉랭함이 느껴진다. 아무말 하지 않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을 통해 복잡한 감정을 스크린 밖으로 잘 내비친다.
직접적으로 장면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주인공의 배경과 심리를 전달하는 김덕근 감독의 뛰어난 능력에 박수를 친다. 영화 ⌜나의 새라씨⌟와 전 작품 ⌜민혁이 동생 승혁이⌟ 모두 가정의 이혼이라는 배경을 소재로 한다. 인간의 슬프고, 아픈 심리를 약 2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단편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감정과 전하고 싶은 메세지를 관객이 알아채기 어렵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용기’라는 메세지가 영화에 그대로 담겼다.
익숙한 클리셰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어떤 배경을 두는지, 어떤 소재를 선택하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영상미와 연출로 풀어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을 전달할 수 있다고 감독은 나에게 영화로 알려주었다.
제작 : 2019
러닝타임 : 25분
평점 : 3.3
연령 : 12세
줄거리
정자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초라한 자기 모습을 숨기려 새라라는 가명으로 도축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정자라 부르는 사람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