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친구와 놀고 싶다.

엄마도 친구가 보고 싶단다.

by 서사임당


두둥, 너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었다.

나도 친구가 보고 싶고 같이 놀고 싶다. 오늘 아침은 작은 설날이다. 여느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렇다. 자유를 찾아 캠핑인지 낚시인지 혼자 나간 남편이 없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은 여느 주말과 비슷한 모습이다. 친구 A의 말이 맞았다. 우리의 대화방에서 남편을 정의한 그 그 문장을 읽고는 정말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이 친구의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나가면 싫고 있으면 귀찮은...”


친구가 보고 싶은 밤이었다. 집 앞 작은 맥주집에서 벌컥벌컥 500cc 두어 잔 마시고 깔깔깔 수다를 떨면 좀 나아질 것도 같은 기분, 남편이 나갈 때 겸허히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 듯 터져 나오는 분노를 삼켰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쾌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을 친구 B가 시원하게 꿰뚫어 설명해 주었다.


“나는 못하는데 너는 하니까

배알 꼴린 거 아니야?”


맞다. 배알이 꼴렸나 보다. 그런데 그 배알 꼴린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초록창에 검색해 보았다.


상대방이 하는 짓이 거슬리고 비위가 상할 때 ‘배알이 꼴린다’는 말을 쓴다. ‘배알’은 창자를 가리키는 순우리말로 그것이 꼴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꼬일 정도로 몹시 기분 나쁘고, 아니꼬운 일을 당해서 ‘배가 아프다, 불쾌하다, 편치 않다’는 뜻이었다.


‘나도 친구랑 놀고 싶다. 너만 놀고 싶냐?

지원이도 그렇고 윤서도 그래. 그렇지만 다 참잖아.’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아니고 잔잔한 호수 같은 것도 아니고 그 중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쓰나미처럼 분노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 친구 말대로 배알이 꼴렸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반박할 수 없도록 그는 분담하고 있는 역할을 철두철미하게 이행하고 나갔다. 방역 수칙에 위반되지 않는 선(인원과 시간)을 준수하므로 신고도 못한다. 하는 수 없이 때마침 전화를 걸어온 어머니께 이 사태를 신고했다. 남편은 비대면 욕을 한 바가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대면이기 때문에 확인할 길은 없다. 다시 전화를 걸어온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레아야, 엄마가 진짜 정신 차리그로 뭐라고 했으니까는 나중에 오면 너무 썽 내지 마라~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럴기다.”


나도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다. 그것이 아들을 위한 액션이라는 것을


늦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나는 해안도로에 나갔다. 걸음을 마저 채우고 마음을 비우기 위한 나름의 의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안경에 계속 김이 서렸다. 안경을 쓰고 보아도 다시 안경을 벗고 보아도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써도 제대로 앞을 못 볼 거라면 자유롭게 벗고 걷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냥 걸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한다고 해도 뭐라고 안 한다고 해도 그는 오지 않을 것인데 내가 이 밤에 안경을 벗고 걸었듯 그대도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좋겠지. 분명 그랬을 것이다.


집중해서 어제의 감정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있는데 어머니가 또 전화를 걸어오셨다. 마치 모닝콜처럼


“우리 며느리 잘잤소? ”


“네... 어머니”




마음속에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기술이다. 마음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협력자로,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나는 잠시 화가 났을 뿐이지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잠시 두려울 뿐이지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며, 잠시 슬플 뿐이지 슬픈 사람이 아니다. 본래의 나는 맑고 고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가 날개의 크기에 상관없이 멀리 창공을 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맞이하지 않으면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은 어둠 속에 갇혀 괴물이 된다. 여인숙의 깨비와 망자와 토리가 불을 끄면 공포의 괴물로 변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