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입장
12월 6일 월요일 낮
뇌종양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상급종합병원에 진료를 예약해야 했다. 병원에 전화하기 전에 엄마가 말했다.
"병이 클수록 어디서 치료받는지, 어느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지가 중요하다. 치료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지금 우리는 급해서 알아볼 여유도 없고, 알아본다고 해도 바로 진료받을 빽도 없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깐, 기도하자. 기도부터 하고 병원에 전화하자. 제일 빨리 진료 잡히는 데로 가자."
새로 시작해야 하는 투병의 여정이 두려우면서도, 아픈 원인을 제대로 찾은 것만으로 감사했다. 빅 5라 불리는 병원에 순서대로 연락하기로 하고 첫 번째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통화가 연결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그날은 몇 번 울리지 않은 통화연결음 다음 바로 연결이 됐다. 마침 경험 많은 의사 선생님 진료 시간이 비었다고 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진료를 잡았다.
진료는 오후 1시 15분이었다. 잠실나루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병원까지는 제법 걸어야 했다. 중간에 성내천을 건너는데, 하천 위에 놓인 다리는 일상과 비일상을 구분하는 경계 같았다. 다리 너머로 솟은 병원은 다다르면 병이 낫는 실로암 같았다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유배지 같기도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 발걸음을 늦출 때마다 '병이 낫든, 차라리 죽어 고통이 사라지든, 오늘 결론이 나게 해 주세요. 더는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얼거렸다. 서울로 다시 올라올 때 남몰래 혼자 하던 기도였다.
병원은 서관, 동관 그리고 신관 건물이 모두 이어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붐볐다. 유행병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마다 동행할 수 있는 보호자를 한 명으로 제한하는 병원 정책이 무색해 보였다. 다행히 예약한 진료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서, 진료의뢰서와 MRI영상을 여유 있게 제출할 수 있었다. 동관 중앙에 있는 신경외과는 몇 달 전에 방문했던 대학병원보다 차분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여러 개의 진료실이 대학 강의실처럼 배치되어 있었고, 복도에는 각 진찰실 입구에는 간호사가 스테이션에 앉아 환자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지 않은 방에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의사 선생님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의 모니터로는, 부산에서 촬영하고 미리 제출한 MRI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의사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말했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혈관아세포종이라고 하는 양성종양이에요.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겠지만, 확실한 것 같고요. 소뇌에 붙어있어서 어지럽고 몸 균형 잡기 힘든 증상이 있을 겁니다. 구토도 하고 몸무게도 줄고."
의사는 MRI 영상을 보면서 나의 병세와 그 원인을 설명했다. 먼저 말하지 않아도 어디가 아픈지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아픈 이유를 설명하느라 답답하게 막혀 있던 숨이 한 번에 터진 기분이었다.
"눈도 초점이 안 잡혀서 잘 안 보여요. 뒷목이 아파서 고개 돌리기 힘든 것도 이것 때문인가요?"
그동안 해결되지 않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소뇌가 있는 뒷목 쪽에 공간이 원래 좁은데, 종양이 커지면서 뇌압도 높아지고, 뇌도 눌리고 시신경도 눌려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은 어렵지 않게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어투로 이어 말했다.
"치료하려면 수술해야 합니다."
엄마는 수술이 위험하지 않은지, 감마나이프와 같은 다른 시술로는 치료할 수 없는지 물었다. 병원에 오기 전에 미리 여러 정보를 찾아본 것 같았다.
"혈관아세포종이 쉽게 말하면 혈관 덩어리 같은 건데, 이건 수술로 한 번에 제거를 해야 완치가 돼요. 개두술 말고는 다른 옵션이 없어요."
선생님의 답변은 단호했지만 명쾌해서, 얼핏 뇌수술이 간단한 치료법 같다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 종양이 많이 커서 빨리 수술을 해야 돼요. 이미 시신경도 누르고 있고. 사실, 내일이라도 갑자기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는 응급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미 수술 스케줄이 가득 차 있지만 어떻게든 일정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그만큼 수술이 급했다. 다만 병원 입원실에 빈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우선 입원을 해야 수술 스케줄을 확정하고, 일정에 따라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은 기존의 일반 입원실을 음압병동으로 전환해 운영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일반병동이 더욱 부족해진 이유였다. 선생님은 곧바로 옆건물에 있는 응급실로 가라 했다. 응급실에서 병세를 살피면서 입원실 자리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대기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규정에 따라 24시간이 넘도록 응급실에 있을 수 없었다. 하루 안에 결론 나지 않으면 다른 병원을 뺑뺑 돌다가 와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수술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바로 응급실에 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동관 건물에서 응급센터까지 이어진 길 위로 부는 겨울 바람이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