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밥 제거
12월 17일 금요일
퇴원을 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병원에 갔다. 수술한 부위에 있는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오른쪽 귓바퀴 뒤에서부터 뒷목까지, 머리카락이 나는 길을 따라 절개된 부위는 길었다. 실밥은 사실 실밥이 아니라 의료용 스테이플러 심이었는데, 잘린 피부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박혀있었다. 스테이플러 심은 한강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다리 같기도 하고, 긴 몸통에서 돋아난 지네 다리 같기도 했다. 이 다리든 저 다리든, 수술 자국으로 생긴 다리는 흉해 보였다.
"실밥 제거해도 괜찮겠네요."
진료실에서 수술 부위를 살피던 의사가 말했다. 상처에 염증이 생기지 않고 잘 아물고 있었던 것이다. 박혀 있는 철심을 제거해야 철심이 박혀있던 피부 조직도 빨리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철심을 제거하는 도구는 따로 있었다. 사무용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하는 별도의 도구가 있듯 의료용 철심도 마찬가지였다. 두피에 박혀있는 철심은 '톡톡'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 빠져나왔다. 철심이 빠지면서 철심이 박혀 있던 부위에 핏방울이 이따금씩 맺혔다. 의사는 군데군데 맺힌 핏방울을 알코올 솜으로 닦아 냈다. 간단한 소독을 하고 진료는 끝이 났다. 수술 부위를 가리기 위해 비니 모자를 눌러쓰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엄마와 나는 '쉑쉑버거'를 먹으러 갔다. 오랜만에 무얼 먹고 싶냐는 엄마의 물음에 떠오른 것이 '쉑쉑버거'였다. 왜 그게 가장 먼저 생각났는지 알 수 없다. 평소에 기름진 음식보다 국밥류를 더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다만 육즙 가득한 패티와 함께 목이 따가울 만큼 톡 쏘는 콜라가 문득 떠올랐을 뿐이었다. 아직 목이 부어서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데도, 꾸역꾸역 버거를 삼키고 콜라를 마셨다. 먹는다는 표현보다는 밀어 넣는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뉴욕 매디슨 스퀘어 공원에서 쉑쉑버거를 처음 먹었다. 2010년 7월의 더운 여름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떠난 여행이자, 내 생애 처음 떠난 외국여행이었다. 당시 미국 여행 안내서에는 쉑쉑버거를 뉴욕에서 먹어야 하는 음식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때 푸드트럭에 줄 서서 처음 사 먹은 수제버거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당시 수제버거라는 개념조차 없던 내게, 갓 구워 뜨거운 고기패티에서 흐르는 육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공원에서 쉑쉑버거를 사 먹고, 도심을 구경하다가 만난 2호점에서 또다시 버거를 사 먹었다. 2호점은 가게 문을 연 지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시원했다.
오랜만에 먹은, 아니 밀어 넣은 '쉑쉑버거'는 지난 여행지에서 처음 먹었던 것만큼이나 맛있었다. 수개월간 곯았던 몸이 회복하기 위해 두 세배 보상을 원하는 것 같았다. 씹는 고기마다 마시는 음료마다 모조리 남김없이 세포에 흡수되는 것 같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음식이 피와 살이 되는 모든 과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를 감안하면 음식이 실제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의 감각은 오롯이 개별적이어서, 내가 느끼는 감각만이 실재했다.
언젠가 봤던 TV 프로그램에서 세렝게티 야생 동물들은 아플 때 먹는 것도 중단하고 잠을 잔다고 했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에너지까지 끌어모아 몸을 치료하는데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자가치유에 성공한 동물만이 다시 음식을 서서히 먹기 시작하는데, 오랜만에 버거를 먹는 내 모습은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자가치유에 실패한 동물들은 잠이 든 체로 죽음을 맞는데, 의료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짐승과 조금 달랐다. 그것이 감사했다. 감사의 마음은 개인의 한계 너머에서 찾아오는 손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이 든 체 죽음을 맞는 것이었는데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처럼. 의사의 신묘한 의술이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비한 기도든 우리 한계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이 감사할 수 있는 이유다.
인생에서 큰 경험을 해본 사람일수록 잔잔한 대양(大洋)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크든 작든 경험은 그 자체로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더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큰 세상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적어서, 무엇을 하든 한계 바깥에서 뻗어오는 손길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감사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이상으로 애쓰기보다 오히려 내려놓음으로써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지는 진기한 경험이 사람을 잔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큰 사람일수록 감사가 가득할 것이다. 부족한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더 큰 세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햇빛이 식당 통창을 지나 가게 깊숙한 곳까지 비추고 있었다. 한 자락 겨울 햇빛에도 문득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