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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Oct 24. 2024

투병의 끝

일상으로 복귀


 병 휴직이 겨우 한 달 정도가 남았을 때 비로소 몸의 기능이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왔다. 급격하게 빠졌던 몸무게가 돌아왔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건강을 찾게 되자 길게 아팠던 시간이 무색하게 남은 휴직기간이 짧게 느껴졌다. 아플 때는 아무렴 어때하던 직장생활이 그제야 다시 답답하게 들이닥쳤다. 동시에, 복직 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만끽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난 것이다. 어지럼증이 시작되고 증세가 악화되던 때, 제주도에서 앓으면서 보낸 시간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던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다시 만회하고 싶기도 했다. 기억 덮어쓰기를 위해 네 식구가 함께 제주도로 향했다. 비틀거리며 겨우 오르내리던 산굼부리도, 좋은 줄 몰랐던 에코랜드도 모두 가족들과 다시 들렀다. 다시 놀러 간 제주도는 완전히 다른 섬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오래되고 낡은 말은 그만큼 대체할 표현이 없다는 것일지 모른다. 건강의 허기가 채워지고서야 여행지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한 아기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 했다. 환자를 살리는 일도 마찬가지 같았다. 식구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족 전체가 매달릴 수밖에. 지난 수개월 동안 혼자 질병과 싸운 것 같지만, 사실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안다. 가족들의 애정 어린 간호와 기도야말로 뇌종양과 싸워서 이긴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므로 제주도 가족 여행은 병마를 함께 극복한 전우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뒤풀이나 다름없었다.



 수개월 만에 출근한 회사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주재원에서 복귀한 부장님 한 명이 팀에 새로 합류했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항상 비슷하게 돌아가는 하루 일과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주간 회의며 업무보고까지 똑같았다. 임금협상 때문에 시끄러웠던 노사분쟁도 마무리가 되어 잠잠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마음이었다. 아프기 전에는 회사에서 누가 이름만 불러도 화가 났다. 온갖 업무보고며 보고서들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직장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뿐이었다.


 업무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온 회사에서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화낼 일이 없었다. 아프기 전에 왜 짜증이 많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생기는 눈앞에 모든 일들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무실에 복귀한 날, '그동안 많이 놀다가 왔으니 이제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팀장의 헛소리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인생에서 큰 일을 겪으면 마음의 크기가 커진다던데, 참말로 사람의 그릇이 커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소한 일에 목매지 않고 넓은 아량을 가진, 바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얻은 삶에 벅찬 감사가 흘러넘쳤다.



 삼 개월이었다. 화내지 않고 회사를 다닌 시간. 깊은 산처럼 고요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는 명제의 증명일 수도, 아프기 전의 상태로 회복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니!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았는데! 이전과 똑같이 사는 게 맞는 거야? 이게 행복한 거야?"


 투병을 끝내고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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