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직전의 스웨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세계는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의 여러나라에서는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으며 또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 미국에서 시작된 대 공황은 결국 세계 경제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5세는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호의적이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후 유럽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나가던 공산주의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왕족이나 귀족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군주를 살해했고, 내전으로 엄청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었습니다. 이런 공산주의가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확대 될것을 두려워했었는데, 나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혼란한 상황을 나치즘이 구해줄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독일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구스타프 5세는 아마도 이런 독일의 상황에 대해서 어느정도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나치지지자들의 인종차별적 상황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써의 나치즘에 대해서 지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문에 구스타프 5세는 히틀러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느꼈으며 그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완화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 5세는 1932년 독일에서 열린 손자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했습니다. 구스타프 5세의 장손이자 왕태자의 장남이었던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는 육촌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시빌라와 결혼하게 됩니다. 시빌라의 아버지인 카를 에두아르트는 빅토리아여왕의 손자로 그의 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인 레오폴드였습니다. 그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명으로 백부인 앨프러드의 뒤를 이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그는 고향인 영국에 등을 지고 자신의 나라가 있는 독일에 충성하게 됩니다. 이 상황은 영국에서의 그의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게 만들었으며, 1차대전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역시 공화국이 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카를 에두아르트의 상황은 결국 그가 나치즘에 열광하고 히틀러와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식은 나치식 행사로 치뤄졌으며 이때문에 부담을 느낀스웨덴에서는 국왕의 참석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결국 국왕은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신랑 부모만이 결혼식에 참석했었습니다.
국왕이 독일에 호의적이었으며, 제2 왕위계승자인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장인이 히틀러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스웨덴에서는 아마도 스웨덴이 독일의 상황에 끌려들어갈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물론 구스타프 5세의 이런 호의는 전쟁이 일어나면서 바뀌게 됩니다. 중립국을 표방한 스웨덴에 대한 독일의 압박과 스웨덴 주변 국가에 대한 독일의 침공, 그리고 마지막으로 끔찍한 학살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스타프 5세에게도 나치즘의 끔찍함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