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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24. 2017

영국과 프랑스는 왜 앙숙이 되었을까?100년 전쟁(3)

전쟁의 결말

샤를 5세는 잉글랜드가 장악했던 여러 지역을 되찾았지만, 미성년자인 아들만 두고 사망하고 말았다. 샤를 6세는 1380년 12살도 안 된 나이로 국왕이 되었다. 그의 초기 통치는 성공적이었지만, 곧 문제가 발생한다. 샤를 6세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는데, 광증을 일으켜 국정을 운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샤를 6세의 왕비인 이자보가 대신 국가를 통치했으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왕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 6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의 루이 Louis d'Orléans가 점점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궁정은 부르고뉴 공작파와 오를레앙 공작파로 갈렸고, 이 갈등은 1407년 오를레앙의 루이가 파리에서 암살당하면서 극으로 치닫는다. 부르고뉴 공작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새 오를레앙 공작이 된 아들 샤를은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1410년 부르고뉴 공작의 가장 큰 반대 세력이었던 아르마냑 백작의 딸과 결혼하면서, 장인과 함께 부르고뉴 공작 가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렇게 부르고뉴 측과 아르마냑 측은 1435년까지 지속되는 내전을 벌인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암살


1415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다시 한번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프랑스로 군대를 보냈고, 원정은 대성공을 거둔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Battle of Agincourt는 프랑스에 절망적일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헨리 5세와 잉글랜드 군은 노르망디 공작령까지 점령했다. 이 상황은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파 모두에게 위기였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전사했는데, 그중 아르마냑파 리더들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잉글랜드와 동맹 관계였던 부르고뉴 공작은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그의 동생들은 아쟁쿠르에서 전사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 파를 지지하던 샤를 6세의 장남 도팽 샤를(도팽은 우리말로 세자 정도의 뜻이다)을 만나 협정을 체결하려고 시도했지만,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서 도팽의 부하가 부르고뉴 공작을 살해해버린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프랑스의 내전이 끝날 수도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부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도팽을 비난했다. 


아쟁쿠르 전투


새롭게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 3세 Philippe III de Bourgogne는 아버지가 살해당한 직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동맹을 맺었다. 필리프와 헨리 5세는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샤를 6세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1420년 조약을 통해 샤를 6세의 딸이 헨리 5세와 결혼식을 올린다.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게 된다. 이로 인해 장남 도팽 샤를은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그는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계속 투쟁했다. 그러던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모두 사망하고 헨리 5세의 9개월 된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도팽 샤를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스로 프랑스의 국왕 샤를 7세가 되었다. 프랑스에는 2명의 국왕이 있는 셈이었다. 샤를 7세는 쪼개진 나라에 있었으며 스스로 왕이 되어 대관식도 못 올린 처지였다. 아버지가 그의 상속권을 박탈한 바 있었으므로 샤를 7세는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관식마저 올리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명분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샤를 7세


 이때 샤를 7세의 삶은 물론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여성이 등장한다. 바로 잔 다르크다. 이 16살 소녀는 샤를 7세에게 가서, 자신이 잉글랜드인들을 프랑스 땅에서 몰아내라는 신의 계시를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샤를 7세가 이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잔 다르크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명분을 주었다. 잉글랜드를 몰아내고 프랑스 국왕으로 대관해서 권위를 세우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은 잔 다르크 덕분에 프랑스 군의 승리가 반복되었고, 샤를 7세는 프랑스 국왕이 역사적으로 대관식을 올리던 장소인 랭스 Reims를 탈환하고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측에 붙잡혀 이단이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연 잔 다르크


이후 1453년 카스티용 전투 Battle of Castillon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잉글랜드가 점령했던 지역 중 거의 모든 곳을 탈환했고, 이것이 100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100년 전쟁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다. 이 전쟁을 끝으로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지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봉건 영주라는 지역 단위로 나뉘어 있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좀 더 큰 국가 단위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고,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가 가속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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