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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17. 2017

영국과 프랑스는 왜 앙숙이 되었을까?100년 전쟁(2)

전쟁 중반기 

100년 전쟁이 시작된 것은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 시기였다. 1337년 필리프 6세는 기옌 지방에 대해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 자격을 박탈하고, 잉글랜드 국왕이 가지고 있던 영지는 프랑스 국왕의 직속으로 둔다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이 순간 전쟁이 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 군을 프랑스까지 동원할 만한 재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정이 마련된 1340년, 잉글랜드 군의 함대는 프랑스로 향했다. 잉글랜드는 해상권을 장악하고 프랑스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때 상륙한 곳이 노르망디 지역이었다. “흑태자 Black Prince”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 Edward Prince of Wales가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함께 프랑스에 발을 디뎠다.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있는 에드워드 3세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보다 더 조직적으로 잘 정비된 잉글랜드가 우세했다.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 Battle of Crécy 나 칼레 Calais 포위 공격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를 서서히 점령해갔다. 필리프 6세의 아들이자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장 2세 Jean II마저 포로로 사로잡을 정도로 잉글랜드의 상승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직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기보다는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영지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 같다. 실제로 이후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프랑스 내 영지를 프랑스 국왕의 소유가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의 소유로 만드는 정도를 원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00년 전쟁은 중세 사람들이 ‘신의 징벌’로까지 여기던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하지 못한 일이었다. 

크레시 전투


결국 잉글랜드는 장 2세를 포로로 잡은 뒤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평화 조약의 핵심은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의 봉신으로서 가지고 있던 영지에 대해 프랑스 국왕이 주종권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아키텐 지방의 영지를 잉글랜드 국왕의 직속 영지로 인정받는 대신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프랑스에서는 국왕이 포로로 잡혔으므로 장 2세의 아들인 샤를이 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 2세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기로 하고 잠시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그를 대신해서 인질이 되어 있던 다른 아들이 도망치자 스스로 다시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었으며 결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섭정이었던 샤를은 바로 국왕 샤를 5세 Charles V로 즉위했다. 


샤를 5세


1360년대 말이 되면서 샤를 5세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잉글랜드는 비록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지만, 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군비를 쓰고 나자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조차 반기를 들었는데, 사회 지도층에 대한 반감이 매우 심했기에 잉글랜드는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다. 샤를 5세는 이때를 노려 잉글랜드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차례로 수복했으며, 1380년에는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는다. 결국 1389년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시작은 3년간의 휴전 협정이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각자의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휴전이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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