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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10. 2017

영국과 프랑스는 왜 앙숙이 되었을까?100년 전쟁(1)

전쟁의 시작 : 프랑스 왕위 계승문제

987년 위그 카페 Hugues Capet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면서 카페 왕가의 300년 통치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가는 이후 프랑스가 공화국이 될 때까지 통치를 이어갔다. 카페 왕가는 오로지 위그 카페의 남성 후계자만으로 통치가 지속되었는데, 가문의 직계 남성 후손이 단절된 경우에는 방계 남성 후손이 왕위를 이었다. 이런 상속의 형태를 뒷받침해준 법률이 바로 ‘살리카 법 Lex Salica’이었다. 

살리카 법은 6세기가 시작될 무렵, 처음으로 프랑크족을 통합한 클로비스 1세 Clovis I 시기에 만들어진 법률이다. 프랑크족에 포함된 여러 부족이 사용하던 법률을 집대성해서 성문화 한 것이다. 살리카 법에는 ‘영지를 여성에게 상속하는 것을 금지’하고 ‘여성이나 여성의 후손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살리카 법은 상황에 따라 느슨하게 적용되었다. 이를테면 남성 후손이 없는 경우 여성과 그 후손의 계승권이 인정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 카페가 국왕이 된 후 남성 직계 후손들이 300년 이상 왕위를 잇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므로, 살리카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1285년 “미남왕” 필리프 4세가 즉위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필리프 4세는 별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 매우 잘생긴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왕권을 중앙 집권화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그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므로 후계자 문제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필리프 4세와 가족들, 아들들인 샤를4세,필리프5세,딸인 이사벨(잉글랜드 왕비),필리프4세 본인,아들 루이 10세, 그리고 동생인 샤를 드 발루아(필리프 6세의 아버지)


정복왕 윌리엄의 시대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프랑스 내에 잉글랜드가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복잡했으므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는 미묘한 견제와 갈등이 생겨났다. 특히 헨리 2세 때 잉글랜드 국왕이 보유한 프랑스 영지가 프랑스 국왕이 보유한 것보다 더 커지는 지경에 다다랐는데, 그러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갈등이 오래 이어졌다. 결국 양측은 잠시 갈등을 봉합할 만한 계기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필리프 4세의 여동생과 딸을 잉글랜드로 시집보내게 된다. 필리프 4세는 이 결혼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게 된다. 

필리프 4세가 죽고 난 뒤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지만, 모두 남성 후계자를 두지는 못했다. 장남인 루이 10세 Louis X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만약 아이가 아들이라면 정당한 후계자로 왕위를 이어받을 예정이었다. 또한 아이에게는 삼촌이 되는 루이 10세의 동생이 섭정을 맡을 예정이었다. 곧 태어난 아이는 그렇게 기다리던 남자아이였고, “유복자” 장 1세 Jean I le Posthume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겨우 닷새밖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   

사실 루이 10세에게는 이미 딸이 있었다. 만약 여성의 상속이 인정된다면 왕위는 딸에게 돌아가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섭정이었던 루이 10세의 동생은 재빨리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프랑스에서 여성의 계승권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조카를 밀어내고 필리프 5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필리프 5세도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같은 이유로 필리프 5세의 동생이었던 샤를 4세 Charles IV가 다음 왕으로 즉위했으나 마찬가지로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한다. 본가인 카페 왕가의 남성 직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므로, 당시 가장 가까운 분가였던 발루아 가문으로 왕위가 이어졌다. 

 

필리프 6세, 발루아 가문 출신의 첫 국왕


하지만 이 순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였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4세의 딸 이자벨이 낳은 아들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남아 있는 필리프 4세의 후손들 중 남성이고 가장 연장자인 자신이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인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라는 자신의 애매한 지위 때문에 이런 주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국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내의 영지때문에 프랑스 국왕들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요구하곤 했는데, 잉글랜드 국왕에게는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다. 사실 대외적으로 본다면 프랑스 국왕과 동등한 지위인데도 말이다.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시작된 이 전쟁은 한 세기 가량 지속되었으며 이후 ‘100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에드워드 3세, 가터훈장을 한 모습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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