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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09. 2023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시민의 자부심

한 나라의 수도에는 그 나라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정치, 경제, 예술, 문화 모든 것에서 다른 도시를 앞서가려 하죠. 그것이 특권의식이 되면 안 되겠지만, 한 나라의 자부심 또는 자존심이 담겨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직항으로만 12시간에서 14시간 걸리는 서쪽의 땅, 서반아, 스페인, 에스파냐 왕국. 그 왕국의 수도인 마드리드 또한 그러합니다. 비록 수도로 임명받은 건 우리나라 서울보다 한참 늦은 1561년부터 지만, 정치적, 행정적 계산 하에 지정된 이 내륙도시에는 에스파냐인들의 한판 자존심이 잔뜩 녹아 있습니다. (비록 코로나 이후 우리나라와의 직항 노선은 마드리드가 아닌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했지만 말이지요.)


마드리드에선 대체 뭘 봐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곧잘 듣곤 합니다. 아무래도 대도시이다 보니 어디서나 비슷하게 보는 현대적 양식이 대부분이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법한 오래된 건물이 잘 눈에 안 띄거든요. 그러니 여행객으로서 들뜨긴 하지만 막상 무엇 때문에 들뜨는지 스스로 자문하는 걸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죽하면 마드리드는 마드리드 자체가 아니라 근교 도시를 여행하기 위한 거점이라고까지 할까요. (아오, 자존심 상해)


그래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미술관들입니다. 프라도, 티센, 레이나 소피아. 메이저급의 세 미술관을 비롯해 소소한 미술관까지 마드리드는 밖에선 모르고 안으로 들어가야지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 첫 번째로 프라도 미술관으로 일단 떠나보시지요.  


프라도의 가을


고온 건조한 날씨. 더워도 덜 습한 날씨. 예전엔 그저 건조하기만 했는데, 기후 이상으로 해가 갈수록 조금씩 습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워낙에 햇살 좋기로 잘 알려진 곳이다 보니 보니 그 옛날 왕족과 귀족은 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수집품을 뽐내고 싶어 안달이었지요. 그렇다고 복잡한 도시 길가에 그 귀한 작품을 마구 걸어놓자니 체면이 안 서고, 가지고만 있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여윳돈으로 아예 마음껏 전시할 공간을 마련했는데, 그 장소가 다름 아닌 잔디 덮인 푸른 초원 (Prato 프라토)이었어요.


바로 이 라틴어 '프라토'라는 말에서 스페인어 '프라도'가 나옵니다. 가끔 프라다로 기억하는 분도 계시는데, 음, 그건 백화점에서 만나보기로 해요. 우리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 하나 지어 보자 노래하잖아요. 이들은 살 집이 아닌 가문을 자랑하기 위한 건물 한번 지어보자 했으니, 스케일이 남달랐던 셈입니다. 실제 스페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다섯 배에 달하니 크기이니 같은 반도라 해도 여러모로 여유가 좀 있겠지요.


프라도 미술관은 그런 배경 속에 탄생합니다. 자자손손 이어온 왕족이 약탈이 아닌 정당한 가격 지불로 작품을 수집했어요. 그래서일까요. 마드리드 시민들은 주위 국가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수탈에 비해 본인들은 보다 인간적인 면이 있다며 자랑스러워합니다.


흠,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예술 작품이며 문화재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기울어진 나라 경제에도 국고를 열고 왕실의 사비까지 털게 만들었어요. 요즘 말로 탕진잼이랄까, 살림은 엉망인데 취향이 고급지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어요. 빚을 갚기 위해 중남미 식민지에서 온갖 지하자원과 노예무역을 일삼아 채웠을 테니, 저들이 내세우는 명예는 빛 좋은 개살구였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819년에 개관해 200주년을 넘긴 프라도 미술관은 전통적으로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양과 질, 명성 모든 것에서 탁월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세계 3대다 5대다 하는 식으로 정하는 건 일본의 영향이 커요. 사실 영원한 건 있을 수 없으니 매년 순위가 바뀌지요. 편의상 세계 3대 미술관이라 하지만, 2017년 포브스 선정에선 8위로 밀려나기도 했어요. 흥미로운 건 그 당시 2, 3위를 네덜란드의 미술관들이 차지했는데, 이걸 조사하고 발표한 분이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대학교수였다는 사실! 그러니 선정 과정이 과연 공정했는가에 대해선 매우 강한 의심이 들지만, 이건 논외로 해 둘게요.


스페인의 계몽 전제 군주였던 카를로스 3세의 애초 계획은 이 건물을 자연사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뜻을 못 이루었고, 아들인 카를로스 4세 때에 옆 프랑스에선 대혁명이 발발했습니다. 국왕의 목을 손수 친 프랑스를 두고 주위의 왕국에선 프랑스를 꺾기 위해 대불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목을 죄었어요. 오합지졸의 프랑스는 연신 깨졌지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프랑스는 왕정 때보다 더 강력한 독재자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랑스를 구한 독재자 나폴레옹은 그렇게 탄생해요.


프라도를 바라보는 풍운아 프란시스코 고야 동상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친다는 명목으로 스페인에 길을 빌려달라 했어요. 우리나라 역사의 임진왜란을 떠올리게 하죠? (나라와 민족이 다른데도 어쩜 이리 하는 짓은 비슷할까요, 참...) 프랑스군은 절반 정도 지어진 프라도를 마구간과 탄약고로 썼어요. 일명 반도 전쟁이라고 불리는 프랑스-포르투갈-영국-스페인의 전투는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이어졌어요.


한 때 스페인의 자신의 형인 조제프 (스페인어로는 호세)를 왕으로 앉힌 나폴레옹은 몰락하고, 독립을 얻은 스페인은 페르난도 7세를 주축으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스페인 건축가 비야누에바를 통해 마침내 프라도 미술관을 마무리 지었지요. 카를로스 3세의 계획을 변경한 건 다름 아닌 왕비 마리아 이사벨의 입김이었어요. 덕분에 지금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으로 발돋움했으니, 남자가 또는 나라가 잘 되려면 여성의 말씀을 경청해야 함은 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인가 봅니다.




스페인은 경제적인 수치만 보자면 우리나라 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습니다. 2022년 기준 연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우리나라가 3만 2천, 스페인이 2만 7천이라는 숫자로도 알 수 있지만, 당장 거리의 차와 사람들의 옷차림, 그리고 손에 쥔 휴대폰만 봐도 스페인의 경제적 수준이 살짝 낮다는 건 눈에 보여요. 그럼에도 이들이 문화 강대국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가 있지요. 이는 문화재의 가짓수 때문만은 아닙니다. 실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랭킹에서 스페인은 중국, 이탈리아의 공동 1위에 이어 48개를 보유해 3위에 올라있어요.


문화 강대국이라는 자부심은 바로 대중이 쉽게 접하고 누릴 수 있도록 예술에 대한 접근성의 문턱을 낮추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락거리인 영화관도 많지만 라이브 공연인 극장도 그 못지않게 많아요. 평일 저녁과 주말이면 인파가 몰립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25세 이하 학생증을 소지한 학생들은 무료이고요. 덕분에 학생들에게 예술이란, 또는 미술이란 지루하거나 교과서 속 갇힌 얘기가 아니라, 언제든 들려보는, 조용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놀이터가 되지요.


프라도 미술관 외관 중앙에 위치한 벨라스케스 동상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습관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집니다. 나이에 따라 작품을 볼 때 다가오는 감동과 해석의 폭이 넓어지는 건 물론이고요. 이는 지식의 성장에 그치지 않고 감성의 성숙으로 이어집니다. 성인이 되면 아예 연중 회원권으로 구입합니다. 세 번만 들어가도 본전을 건지거든요. 예술 작품에 대한 흥미와 이해도가 올라가는 건 덤입니다. 심지어 그 1년권은 한 도시의 한 미술관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 자매결연 맺은 다른 박물관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답니다.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다수의 시민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익히고 체득해 고전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문화 강국!


백범 김구 선생님의 글이 새삼 새롭게 다가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략)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우리나라도 요즘 K-pop, K-food, K-beauty 등 다방면에서 한국을 앞세우고 있죠. 해외에 10년 이상을 산 교민으로서 생생한 변화의 현장에 있음이 자랑스러워요.


미래를 내다보는 시각으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꾸준히 이끌어낼 컨텐츠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전통의 무형, 유형 유산을 잘 간직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울러 물질적 풍요를 넘어 삶의 폭을 넓히는 문화적 부유함 또한 고루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제목 사진: 프라도 미술관 매표소 앞 대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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