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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3. 2023

세비야, what else?

조지 클루니, 숀 코너리, 피어스 브로스넌... 원래도 멋있었고, 나이 들수록 더 멋있는 분들의 대명사지요.

이분들을 보면 세상 참 불공평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함 없이 다 가진 분들, 맞지요?


세비야가 그런 면에서 비슷하달까요? 날씨 좋은 스페인에서 좋은 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역사의 황금세기라고 불리는 16세기, 세비야는 스페인의 독점 무역권을 갖고 과달키비르 강을 통해 신대륙으로부터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받아들입니다. 아쉬울 게 없지요. 

먹고 사니즘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문화생활을 누리고 싶어 지잖아요? 코르도바를 누르고 16세기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세비야는 오페라의 무대로 자주 등장합니다.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비제의 <카르멘> 등, 당대에 잘 나가는 작곡가들에게 사랑받는 도시가 되지요. 그래서 세비야는 <오페라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옛말이 세비야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부유했던 과거에서 좀 기울어졌다 해도 대범함은 대를 이어 남아 있어서인지, 일을 할 때 시원시원하게 넘어갑니다. 하나하나 따져가며 맞니, 틀리니 확인하는 사람만 괜스레 쪼잔해져서 의문의 1패를 당하게 되는 곳이 여기 세비야예요. 


그런가 하면 '안달루시아의 프라잉팬'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뜨거운 이 도시는 한낮의 태양보다도 더 열정적입니다. 일 빼고 춤, 노래, 술과 대화에 적극적입니다 (그냥 일 빼고 전부 적극적이라면 될 것을). 우리도 어디에 빼놓을 수 없는 '음주가무'의 유전자를 지니긴 했지만, 이들의 시끌벅적, 야단법석, 존재감뿜뿜하는 앞에는 신속히 인정해 주는 게 좋을 듯해요.


자카란다 사이에 보이는 히랄다 탑 (출처: 유로파 프레스)


늦봄에 세비야 시내로 들어서면 도시 곳곳에서 내뿜는 화려한 색채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보랏빛 꽃송이의 Jacaranda 하카란다 (자카란다)가 한껏 흐드러지게 피어 가로수를 담당하고 있어요. 한편, 몇 겹의 세기를 껴 입었을 이름 모를 아름드리나무가 널찍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지요. 오렌지 꽃의 진한 향기가 숨 막히도록 황홀하고요. 거리마다 심긴 화사한 나무와 꽃들도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게 만듭니다. 극락의 눈호강을 하는 것이지요.


뜨거운 햇볕에 목이 타고 지친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고, 몇 모금 넘기면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취기를 전해주는 상그리아(샹그리아 아님 주의!)를 마셔보면 어떨까요. 방금 짜낸 착즙 오렌지 주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고도 상큼합니다. 이탈리아에 젤라토가 있다면 스페인엔 helado엘라도가 있습니다. 입맛대로 골라 먹으며 잠시 테이블에서 그간 찍었던 사진을 보며 추억과 체력을 재충전하는 것도 여행팁이 되겠네요. 눈에 이어 입도 즐거워지는 순간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대성당과 알카사르 왕궁. 시간의 타임머신 속에 21세기의 나는 어느새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를 연발합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과거 장인들의 역작이 담긴 건축물과 장식을 보며 인간의 위대함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줄을 잇습니다. 책에서 보던 부분적으로 떠다니던 조각난 사실들, 수많은 건축 양식과 정교한 장식이 퍼즐을 맞추듯 차곡차곡 머리에 들어옵니다. 여행이 서서하는 독서라면 독서는 앉아서 떠나는 여행이지요. 힘들긴 해도 몸으로 경험한 체험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행복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알카사르 왕궁 근처에는 옛 영화에서 봤을 법한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어렸을 적 구연동화 테이프에서, <크시코스의 우편마차>라는 피아노 소곡집 제목에서 접한 그 마차. 그림과 영상으로만 존재하던 마차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다니는 걸 보니 시간 여행을 한 기분입니다. 마차에 오르자 녹음이 아닌 실제 따그닥 따그닥 경쾌한 갤럽이 귀를 시원하게 합니다. 마차에 몸을 맡기고, 피곤한 다리 쉬어가며 살랑거리는 바람맞으니 여행지에서의 경험치가 기분 좋게 올라가는 건 덤입니다.


마차는 시내를 빠져나와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다 공작부인이 1893년 세비야 시에 기증한 마리아 루이사 공원에 들릅니다. 아메리카 광장에서 잠시 내려 고고학 박물관과 예술과 풍습 박물관 앞에서 한껏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습니다. 포토 타임 후 다시 타면 김태희의 플라멩코가 선을 보인 장소이자 스타워즈 2의 배경으로 나온 이색적인 공간, 스페인 광장에 도착합니다. 호방한 세비야의 기상이 그대로 녹아든 곳으로 스페인의 통일 이전 네 왕국을 상징하는 네 개의 다리에는 여행객들이 저마다 추억으로 간직하려고 모델이 되었습니다. 타일로 장식한 48개의 주요 도시를 죽 훑어보니 스페인 일주를 마친 느낌입니다.

저녁 시간이 되니 저마다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저 또한 부산한 마음 추슬러 봅니다. 가사는 모르지만 절절히 가슴을 울리는 멜로디, 듣다 보면 저절로 따라 치게 되는 박수, 요란한 듯하면서도 절제된 발굽의 춤사위, 신들린 듯한 기타 연주. 숨 막히도록 열정적인 플라멩코 공연에 같이 녹아들고 나니 그간 닫혀있던 오감이 정점을 찍습니다. 클라이맥스에 달한 오감의 열기는 쉬이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세비야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충분히 제공해 주었습니다. Sevilla, what else? 세비야 도시만으로도 일주일은 부족합니다.



제목 사진: 세비야 스페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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