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5. 2023

헤밍웨이가 사랑한 론다

스페인의 정열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가 많습니다. 세비야, 말라가, 마르베야, 카디스, 그라나다... 그중에 크기는 작지만 지명도에 있어서는 그 어떤 것에도 밀리지 않는 마을이 있으니, 주민수 불과 3만 3천 명인 <론다>입니다.


론다는 일주일 남짓 기간,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나 큰 스페인을 훑고 지나가는 단체 일정 중에도 놓치지 않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잔잔한 기타 연주의 버스킹을 듣고, 차 한 잔에 비친 구름을 가만 응시하다, 눈 아래 펼쳐진 누에보 다리를 보다 보면 근심도 걱정도 다 부질없음을 깨닫게 하는 장소, 론다. 이곳은 헤밍웨이가 사랑한 마을로도 유명합니다. 

 

론다에서는 복잡다단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등 지식을 채우지 않습니다. 여기는 채우기 보다는 비워야 합니다. 풍광과 절경인 다리를 보며 머리를 식히고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봅니다. 론다는 남부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Sin pausa pero sin prisa
쉼 없이 그러나 서두름 없이


여기서 pausa라는 건 잠깐 쉬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쉬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빨리빨리 문화는 애당초 개념도 없지만, 있다해도 금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일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완전히 손을 놓는 일은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재촉해서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한결같이,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맡은 바를 이루어 갈 따름입니다.   


협곡마을 론다


론다는 언제 찾아가도 거의 변하는 게 없습니다. 풍경도, 건물도, 사람도 전에 와서 본모습 그대로입니다. 

론다는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으로 유명합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뿐만 아니라 현대 투우방식도 이곳 론다에서 탄생했습니다. 마초로 살다 간 헤밍웨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투우였어요.


론다식 투우가 현대 투우의 전형으로 자리 잡기 전, 투우는 말을 탄 채로만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이 고장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는 경기 스타일을 바꾸었고, 그의 시도는 이제 투우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로메로의 유명세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초상화와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등장할 정도였지요. 이제는 투우도 투우장도 옛 명성만 남았을 뿐입니다. 당시만큼의 인기는 없지만, 론다 투우장은 매해 9월 초면 마을축제로 어김없이 투우를 열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를 맞이합니다.




미국인 작가 헤밍웨이는 스페인 사랑이 남달라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전할 정도였습니다.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1939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하지요. 이후 1943년엔 영화로도 제작해 잉그리드 버그만과 게리 쿠퍼가 열연을 했습니다. 헤밍웨이는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의 '묵상 17' 시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당시 성당의 종을 울린다는 건 누군가 죽었다는 것을 뜻했어요. 시 일부를 발췌해 소개합니다.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중략)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라는 존재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 그러니 저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상남자 헤밍웨이, 그에게 스페인은 투우와 플라멩코와 같은 피를 끓게 만드는 열정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론다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길 정도였지요:

Ronda is the place where to go, if you are planning to travel to Spain for a honeymoon or for being with a girlfriend. The whole city and its surroundings are a romantic set... Nice promenades, good wine, excellent food, nothing to do...

신혼여행이나 여자친구와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면 론다는 꼭 가봐야 할 곳이다. 도시 전체와 그 주변 환경은 낭만적이다... 멋진 산책로, 좋은 와인, 훌륭한 음식, (이 외에 다른) 할 일이 없다...


그라나다와 세비야 사이에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야만 하는 이 시골마을의 길을 헤밍웨이는 대체 얼마나 좋아했던 것일까요. 투우장 옆에는 오손 웰즈와 나란히 헤밍웨이의 흉상이 있습니다. 심지어 국영 호텔 파라도르에는 아예 '헤밍웨이의 산책로 Paseo de E. Hemingway'라는 길 이름마저 타일 장식으로 있을 정도입니다.


산책길을 따라가고 나면 높이가 무려 100미터가 넘는 다리인 푸엔테 누에보 (Puente Nuevo, 새로운 다리)가 나옵니다. 다리의 폭도 길이도 좁고 짧은 터라 별 감흥 없이 걸어봅니다. 그러다 다리 끝에 이어진 전망대로 가 뒤돌아 보면 똬! 하고 펼쳐지는 장관에 오금이 저리지요. 과달레빈 강 때문에 한 지역이 둘로 나뉘어 소통에 장애를 겪다가 18세기에 와서야 3개의 다리를 마련했습니다. 그중 마지막에 완공된 다리에 '새로운 다리'란 이름을 붙어주었지요. 정작 다리를 건너가 보는 입장에선 '오래된 다리'라는 건 안비밀입니다.


론다의 누에보 다리


날씨 좋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누에보 다리 건너 구 시가지 오른편 아래로 내려가 보시죠. 스페인에 찾아오는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를 만나 한껏 기분 내며 앨범에 담아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건 따사로운 볕을 쬐며 졸음이 눈꺼풀 위로 떨어지며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올 때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살짝 탄 코르타도 Cortado 한 잔을 주문하고 잠시 자신을 반추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Sin pausa pero sin prisa로 자신만의 호흡과 속도를 지켜가며 주어진 일을 느리더라도 하나씩 해 나가는 현지인의 모습. 


이와 대비되는 저의 일상 ㅡ 주위 눈치를 살펴보느라 자아를 잃어버리고, 바쁘게 사는 게 미덕인 줄로 알아 자신을 놓쳐버린 과거, 쓰는 저도 그렇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분들도 지금 살짝 후회가 스쳐가나요? 그룹 들국화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행하는 지금은 다른 누가 아닌 나에게 오롯이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가 헤밍웨이가 될 수는 없겠지요. 굳이 그와 같이 될 필요도 없겠고요. 그렇다 해도 혼자 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이 여행의 의미를 몇 줄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론다는 당신의 가치를 빛내줄 겁니다. 더없이 높고 푸른 하늘이 가슴 시리고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론다의 오후입니다.



추천 영상. 스페인 가수 마누 테노리오의 <Sin Pausa Sin Prisa> 


추천 영상 2. 전인권 님의 <걱정 말아요 그대>


제목 사진: 론다의 상징, 누에보 다리

이전 05화 세비야, what els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