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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7. 2023

유럽의 발코니, 네르하

이번 여름 어디서 어떻게 보냈나요? 갈수록 뜨겁고 습해지는 날씨에 농반진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름은 한국에서 쪄 죽거나 스페인에서 타 죽거나 둘 중 하나예요."

 

우리나라에서는 33도만 돼도 폭염주의보, 35도면 폭염경보의 재난문자가 쇄도합니다. 솔직히 이 문자를 받아볼 때마다 이해가 안 됐어요. '아니 겨우 이 정도 더위에 '재난'이라고 본단 말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문자-특히 그 경고음 때문에-깜짝 놀라고 내용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의 여름은 한낮에 40도를 오르내리는 게 일상다반사거든요. 겨우(?) 33도 35도에 재난문자가 오는 걸 보면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는 거지요. 아이들의 학교는 6월 셋째 주부터 방학에 접어들고, 그 셋째 주마저도 사실상 수업 대신 영화 상영, 보드 게임 등 풀어진 모습이라 일찌감치 할아버지 할머니 댁으로 떠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개학은 보통 9월 둘째 주에 하기 때문에 여름방학 기간은 거의 석 달에 가깝습니다. 한 해의 1/4을 쉬는 거죠. 말 그대로 공부에서 놓아주는 방학放學입니다.


실은 우리나라의 경우 워낙 80% 이상으로 습도가 높은가 편이라 상대적으로 낮은 더위임에도 체감상으론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스페인은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내륙지방의 경우 습도가 10% 안팎 인지라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셔터 내리고 가만히만 있으면 에어컨 없이도 버틸만해요.


코스타 델 솔 (태양의 해변), 네르하


그래도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려면 역시 바다로 가야겠죠. 참고로 유럽 사람들에게 휴가란 협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통보입니다. 자영업인 식당조차도 너무나 당연하게 한 달 또는 두 달씩 쉰다고 (미리도 아니고 휴가 떠나는 당일에) 종이 한 장 덜렁 붙여놓는 일이 허다해요. 


실화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10년을 넘게 산 저도 이들의 여름휴가 기간에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근면성실로 무장해서 살다 온 관광객이 놀라는 거야 일도 아니죠. '아니, 평소에도 시에스타 챙겨가며 제대로 일 안 하는 거 같은데, 대체 일다운 일은 언제 하는 거여?' 하겠지만, 정착해 살다 보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날이 찾아옵니다. 


요즘엔 기후가 이상해져서 9월, 10월까지도 낮 최고 기온 36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스페인에서도 재난 문자를 보내고, 포르투갈에선 경보령을 내렸어요. 어찌 되었건 이들에게 여름휴가가 일방 통보인 까닭은, 계약서에 나와 있는 휴가 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봄철에 부활절 휴가를 다녀오며 이미 3~4개월 전에 예약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세워진 대도시는 점점 비어 가고, 현지인의 빈자리는 빛나는 태양을 찾는 관광객들로 채워 갑니다. 7, 8월에 활활 불타는 대낮의 스페인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비로소 시에스타가 게으름이 아니라, 극악할 정도로 고온건조한 환경에서 삶의 지혜가 담긴 생존 수단이자 철학임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여기서는 프랑스나 독일처럼 뜨거운 와인인 뱅쇼나 글뤼바인이 없고, 상그리아 또는 틴토 데 베라노 (tinto de verano, 여름의 와인)처럼 차가운 와인이 있는 이유도 다 그들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광장 테라스에서 잠시 냉토마토 수프인 가스파초를 마시며 몸을 식힙니다. 안달루시아의 남지중해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집,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된 듯한 지중해를 따라 달리니 눈이 시원해집니다. 라디오를 틀어보니 끈적끈적한 레게톤(중남미 라틴 댄스 음악) 리듬의 '데스파시토 Despacito'가 흘러나옵니다. 분명 제목은 '천천히'인데 듣는 저의 심박수는 어째 자꾸만 빨라집니다. 둠칫둠칫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며 그루브를 탑니다. 


채널을 돌려보니 작고한 파바로티 선생님과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가 결성한 '쓰리 테너'의 <오 나의 태양 O Sole Mio> 공연 실황 녹음이 나와요. 볼륨을 올립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어느새 증발한 수증기처럼 스트레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말라가 주의 이 해안은 코스타 델 솔 Costa del Sol이라는 태양의 해변입니다. 코스타 델 솔은 서쪽 지브롤터에서 동쪽 그라나다 주에 이르기까지 185km가량 이어지는 지중해 해안입니다. 어떤 것이든 예쁘게 표현하는 스페인답게 태양의 해변 외에도 빛의 해변, 황금의 해변 등 단순히 ‘지중해’ 하나로 묶지 않고, 12개나 되는 이름을 일일이 붙여 개성을 뽐내게 했습니다. 


유럽의 발코니 광장, 네르하


'태양의 해변'은 무려 15개의 마을을 끼고 있습니다. 그중 네르하는 특별히 ‘유럽의 발코니’란 별명을 가졌습니다. 작지만 오는 이들마다 며칠이고 머무르고 싶게 만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별명이 외국인이 붙인 게 아니라, 실은 스페인 국왕인 알폰소 13세가 남긴 것이라는 점입니다. 유럽 각국이 저마다 유럽역사에 있어 한몫을 단단히 해서였을까요. 작은 휴양지 마을조차 유럽 대륙이라는 스케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 잠깐 웃어 봅니다. 이곳을 그렇게도 아낀 국왕은 지금도 동상으로 남아 뒷짐 지고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어요. 


유럽의 발코니 광장 바로 아랫사람들은 저마다 일광욕을 즐기거나 물놀이를 합니다. 여유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누드 비치도 아닌데 상의 탈의한 분들이 제법 있어요 (선글라스 필수 및 사진 촬영 금지). 사실 성性의 본질은 아름다움, 미美 그 자체지요. 신이 창조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부끄럽거나 망측하다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sex의 대상으로 본다는 건 타락한 자본주의에 물들고 음란마귀에 씌었다는 증거이니 당장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뭐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눈부신 햇살 아래 자신의 휴가를 온몸으로 당당하게 즐깁니다.


에메랄드와 터크와즈의 빛이 어우러진 지중해 파도에 잠시 발을 담가 봅니다. 지중해는 무좀에 특효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무좀도 없어서) 바다는 언제나 어렸을 적 부모님과의 추억으로 일렁입니다. 그때는 시골 할아버지 댁의 계곡만 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내던 때가 있었지요. 


스페인의 국영호텔체인인 파라도르 Parador로 발걸음을 어슬렁 거리며 자리를 옮깁니다. 북적이는 관광객, 광장에서 버스킹 하는 기타, 야자나무 위 시끄러운 새 트리오-초록앵무, 갈매기, 비둘기. 이들로 시끌벅적하던 해안과 달리 이곳 테라스는 테이블 위의 음료 한잔이 전부입니다. 


여느 때 같으면 이런 순간을 놓칠 수 없으니 사진으로 남겨야지 했을 겁니다. 하지만 고요한 환경 때문일까요. 흔한 설정샷이며 인증샷 하나 남기지 않아도 마음에 별 아쉬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신산했던 마음은 이미 평온의 세계로 들어가 힐링의 시간이 밀물처럼 들어오고 있습니다. 항우울제는 짐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발코니인 네르하에서 쓰리 테너의 태양은 어느새 저의 찬란한 태양이 되었습니다.


알폰소 13세 동상과 지역 어부 동상


제목 사진: 네르하의 칼라온다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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