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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6. 2023

달라서 오히려 좋아, 그라나다

SPAIN IS DIFFERENT


스페인 오기 전 슬로바키아에 살던 당시,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의 시내 쇼핑몰 내 있던 스페인 식료품점의 이름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다르길래 저러나 싶었지요. 난생처음 주렁주렁 매달린 돼지 뒷다리를 보고 기겁을 했더랬습니다. 레드 와인을 차디찬 글라스에 넣어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는 건 또 어떻고요. 훗날 스페인에 와 보니 한집 걸러 하나씩 있는 생햄 하몬과 칵테일 와인 상그리아 (샹그리아 아님 주의)였습니다. 먹는 것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 스페인, 강한 인상을 남겼지요.  


이후 유럽 전 판매법인의 자리에서 스페인 동료들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화려함과 촌티 어디쯤인가에 걸쳐 있는 정장을 입어도 튀는 옷차림, 기름기 질질 흐르는 곱슬머리 흑발, 만날 때부터 헤어질 때까지 좀처럼 쉬는 일 없이 쏟아내는 수다. 여기에 회식과 뒤풀이 시간에는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입담으로 존재감을 있는 대로 뿜어내는 그들. 그들의 업무 성과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수다 떠는 것과 노는 것에는 진심이라는 걸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몇 번의 출장과 이메일로만 알고 지내던 막연한 스페인에서 10년도 넘게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여전히 무언가 다르고, 무언가 독특하다는 걸 변함없이 체감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마을,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전경




우리는 흔히 유럽이라고 한데 묶어 부르지만 실은 그 안에 50 개나 되는 저마다 개성 뚜렷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보니 유럽은 이렇더라는 식으로 퉁쳐서 얘기한다는 건 무리입니다. 우리만 해도 동북아, 동남아, 중동을 하나로 묶어서 아시아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여행 중 수시로 약속이나 한 듯 "니하오, 스미마셍" 등의 말을 저들이 할 때면, "노, 아이 앰 코리안!"이라고 당당히 알려주는 한국인, 존경합니다. 


여하간 우리 이상으로 민족도, 언어도 전부 다른 유럽에서도,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일하게 아랍의 지배 하에 있던 곳입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200년도 더 일찍 무슬림을 몰아내었기에 여타의 유럽 국가처럼 문화적으로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만, 스페인은 무려 800년 가까운 세월을 무어인들과 보냈기에 이국적인 정취가 강합니다.


즉, 출발부터가 다르다는 것이죠. 기원전 로마제국의 속주로 있었다 해도, 이베리아 반도는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인 무어인의 통치에 들어갔기에 피레네 이북의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갑니다. 1492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톨릭의 깃발 아래 국토의 통일을 이뤘지만 그 흔적은 언어와 풍습, 건축물과 장식 등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다르다는 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 "오히려 좋아!"가 되어 세계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되었지요.


중세인 8세기부터 피레네 이북의 유럽과는 다른 길을 걸어와서 그런 것일까요.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자기들과 유사성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들 땅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보러 오지요. 다시 말해 저들은 스페인을 유럽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재미난 건 스페인은 다른 나라에서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내가 너희와 다르다고? 그래서 뭐? So what? 당당히 자기 길을 갑니다.


그렇다 해도 스페인 역시 제법 큰 나라이다 보니 ㅡ 러시아, 우크라이나, 프랑스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ㅡ 지역별로 문화차이가 상당합니다. 이는 지방별 언어를 사투리가 아닌 '공동 공용어'라는 이름으로 법적 지위를 인정한 것만 보더라도,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강한 개성으로 뭉쳐 있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러다 보니 외국인의 입장에선 그저 스페인 사람이라고 쉽게 보지만, 저들에게는 고향과 고장에 따라 자신은 스페인 사람이기 이전에 마드리드, 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야 등 각자 출신지역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자신들 고유의 역사와 문화, 예술에 어깨뽕 가득 올라갈 자부심을 가집니다. 


알람브라 궁의 아라야네스 정원


이방인의 눈으로는 이미 달라도 너무도 다른 스페인 사람인데, 그들은 다시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곳으로 여긴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라나다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에 꼽힐 곳이에요. 어떤 점에서 그런지 찾아가 볼까요. 


일단 간판부터 흔한 알파벳보다는 아랍어 풍의 느낌으로 구불구불 쓰여 있습니다. 기념품으로 자주 등장하는 타일에는 단순 채색의 그림이 아닌 정교한 기하학 패턴인 아라베스크 arabesque와 젤리즈 zellij 양식으로 꾸며져 있고요. 커피를 파는 카페보다 아랍식 찻집과 시샤(물담배)를 피는 곳이 더 많이 보입니다. 여기가 대체 유럽인가요, 아랍인가요.


알바이신과 사크로몬테의 구불거리는 거리는 1960년대의 히피족이 환생했는가 할 정도로 옷차림과 머리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스페인은 어디에 있나 할 정도로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을 줍니다. 얼굴 생김새도 다르고, 저마다 영어 억양도 특이하기에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걸 눈치챌 수 있어요. 성별도 나이도 다른 저들은 그럼에도 별다른 막힘없이 얘기를 나눕니다. 


이국적인 스페인에서도 가장 이국적이라 할 수 있는 그라나다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것이지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거리낌 없이 즐기는 모습을 보니, 그라나다가 저들에겐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인가 싶습니다.




알람브라 궁의 사자의 정원


우리는 다름을 두려워해왔습니다. 모난 돌은 정 맞는다고 배웠어요. 반만년의 빛나는 전통을 가진 역사 속에 단일 민족으로 자리 잡아온 우리는 배달의 자손이라 했지요. 그러니 ‘굳이’ 세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해하고 처신해야 하는 고맥락 언어문화군에 살아왔습니다. 아무리 속담에선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하지만 마주하는 현실에선 정도껏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평가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문화의 틀에서 자라다 보니 단결도 잘 되었고, 목표가 있으면 달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불도저 같이 밀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유례없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그러다 IMF를 겪고 휘청거렸어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졸업한 나라가 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일상이 위기인 한국에서 한국인은 국난극복이 취미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세계에 둘도 없는 정말 특이하고 특별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방향으로 모두가 가야 하는 곳에서 내가 당신과 다르다는 건, 당신과 다른 생각, 견해, 시각, 관점을 가졌다는 건 침샘이 꼴깍 넘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존중받기보다 틀린 걸로 오해받기 십상이었으니까요. 언제나 대세에 촉을 세우고 유행에 민감해야 됐습니다. 심지어 각 나이대에는 반드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요. 모든 것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으니 그 기대로 가야만 해야 했습니다. 벗어나면 쟤 혼자 왜 저래? 지가 그렇게 잘났어? 왜 혼자 튀어? 등 온갖 험담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정답이 정해진 사회에선 줄을 세우기가 쉽지요. 등수로 사람의 모든 걸 결정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과연 그게 맞는 거였을까요? (어쩌면 그때는 그것만이 살아갈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니다로 봐야 할 듯싶네요) 여하간, 처음 만난 낯선 이와도 편하게 말을 건네며 이런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는 그들을 보며 떠오른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왜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한다와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말의 이유는 무엇이며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대체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그런 거였을까요. 


오랜 세월 속에 수많은 주인을 거쳐간 그라나다는 같음에 길들여져 온 우리, 아니 저에게 다르게 산다는 건 틀린 게 아닌 그저 다를 뿐이라는 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실은 다르기에 오히려 매력 있어 좋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다르다는 건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차이일 뿐, 결국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부족한 언어라 해도 진심 어린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요. 


너무 무겁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저들 나름의 '중용'이란 지혜를 그라나다는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관광지로 잘 알려진 알람브라 궁에서 뿐 아니라 일상의 거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솝우화의 이야기처럼 강한 바람이 아닌 뜨거운 햇살에 나그네가 입던 옷을 벗듯, 저도 자연스레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그라나다에 매료되었습니다. 다르니 오히려 좋아! 관용의 마을 골목길로 한 발씩 빠져 들어갑니다. 여기는 그라나다입니다.


알바이신에서 바라본 알람브라의 석양과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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