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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8. 2023

피카소를 아시나요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을 그 어느 때보다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분명 노력만이 아니라 1%의 영감을 강조했습니다. 즉, 99%의 노력이 있다 해도 그것을 완성시켜줄 1%의 영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큐비즘의 아버지, 파블로 피카소. 그는 천재일까요 아니면 노력의 대가였을까요. 스페인 국내의 명성을 넘어 월드 클래스로 칭송받는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천재의 대명사입니다. 저는 그런 피카소가 싫었어요. 원래 열등감에 쩔어 사는 사람은 누가 잘난 꼴을 못 보는 법이죠. 사촌이 땅을 안 사도 배는 늘 아팠을 인간입니다. 


피카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선 카탈로그를 만들 정도입니다. 일단 그의 그림에선 뭐가 아름답거나 멋진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냥 좀 평범하게 하면 두드러기라도 돋는 걸까요. 온통 조각난 얼굴과 몸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게다가 그분의 그림에는 해석할 여지를 그다지 남겨두지 않습니다. <게르니카>처럼 역사적 배경을 알면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할 작품도 있긴 하지만, 이런 건 그가 남긴 것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요. 종교화에 익숙해 상징과 의미를 분석하고 이해하던 습성이 피카소로 넘어오자 도상이라곤 당최 적용할 수 없는 난해함에 그림을 마주하기가 싫어질 정도입니다.


게르니카,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마드리드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한데, 저와 같은 범부의 노력을 훌쩍 넘어 천재의 반열에 오른 파블로가 그냥 싫습니다. (대개가 그렇죠. 싫으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싫은 법이에요. 이런저런 이유는 더 구차해질 뿐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싫어서 싫은, 전형적인 소인배의 인식을 단박에 깨고, 그랬던 저를 부끄럽게 만든 곳이 있으니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이었습니다. 피카소 미술관은 스페인에 두 도시에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남부 말라가 - 여기엔 피카소의 생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청년시절 활동하던 바르셀로나, 이렇게요.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은 소년기, 청년기, 특히 청색시대와 장밋빛 시대의 습작과 작품 위주로 있습니다. 피카소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대가로서의 작품이 있는 프랑스 파리와는 다릅니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다소 생소하지만 그만큼 천재 화가의 유년기 시절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피카소는 인위적이고 이상적인 미학보다는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대로 담았습니다.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하나의 시점만으로 나타내던 원근법을 무너뜨렸습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진 대상이 왜 하나의 시각만으로 보여야 하는가! 이건 불완전하다! 그러니 화가 앞에 놓인 오브제는 수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완전히 다른 피조물로 탄생해야 한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며 그의 생각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첫 번째 오해, 아니 무지를 풀었습니다. 피카소에게 미술이란 사물에 대한 재해석의 과정이었기에, 다른 화가들의 고정관념처럼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었지요.


개성이 드러나는 이상, 기존의 관습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는 그 혼란 속에 무엇이 절대적인 가치와 약속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요. 해석 자체가 불필요한 작업이죠. 해석이라는 시도 자체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를 봐 달라는 그의 올곧은 의지와 일관된 주장은, 작품마다 침묵으로 그러나 그 어떤 설득보다도 힘 있게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자신의 생각과 시대의 상황이 읽히니 더는 작품을 애써 분석하려는 난해함이 아니라, 그의 탁월한 영감에 무릎을 치게 되었지요. 두 번째 곡해의 실타리가 풀리는 순간입니다.


피카소는 처음부터 세상에 천재로 등장한 게 아니었습니다. 엘 그레코 화풍의 그림부터 그가 가장 존경했던 벨라스케스의 모작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전까지 대가들의 작품들을 수없이 따라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애송이로 취급받을 십 대에 이미 원숙기에나 그릴 법한 대작을 그린 그에게 일반적인 미술수업은 지루했겠죠. 어린 나이에 대가의 붓터치로 캔버스를 채우는 그의 실력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해도 '그럴 만도 하지' 내지는 '그래도 돼'라는 인정을 받고도 남았을 겁니다. 남들과 같아질 필요가 없어진 마당이라면 남은 건 하나,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정립하는 일이겠지요.

 

피카소가 재해석한 <시녀들>


갤러리를 오가며 보던 중 저도 모르게 ‘악, 이건 미친 짓이야!’라고 발작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명작 <시녀들>을 자그마치 5개월에 걸쳐 46개로 개작한 피카소 버전의 시녀들입니다. 고희도 훌쩍 넘긴 어르신의 집념과 노력이 낳은 역작이지만, 솔직히 제가 벨라스케스라면 가슴을 치고 머리털을 뽑았을 겁니다. 위에 사진을 보세요. 여러분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요. 박수를 치고 싶은가요 작품을 치고 싶은가요.


그러나. 그 누가 단 하나의 주제를 두고 이렇게까지 파헤치고 헤집고 뒤집어엎을 수 있을까요. 피카소에게 그림이란 감자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찌고, 볶고, 굽고, 삶고, 튀기고... 온갖 걸 다 만들어내니까요. 그에게는 이미 잘 그렸다, 못 그렸다의 일차원적 평판이 의미가 없습니다. 평론가들의 전문적인 평판이든 대중의 일반적인 반응이든 이미 차원이 다른 세계에 있는 그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갈 길 가련다이지 않았을까요.

 

노력 속에 영감을 탄생시키고, 그 영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과 노동은 무수한 붓질 속에 씨줄과 날줄로 수를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냥 천재가 아니라, 노력이 낳은 인재라고 봐야 맞지 않을까요.


피카소는 죽을 때까지 60여 년간 3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최소한 하나 반의 작품을 남겨야 가능한 결과입니다. (그중에 동일해 보여도 하나하나를 다 작품의 개수로 인정하는 판화가 무려 2500여 점이나 된다는 건 안 비밀! 물론, 판화가 쉬운 건 아니지요)


천재화가 피카소? 더는 천재라는 단어만으로 그를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감만으로도 그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피카소와 그의 작품에 대한 나의 우매함과 오해가 깨지자, 비로소 그의 메시지가 선명히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하라.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의 길을 우직히 가라. 당신의 삶에서 당신은 이미 피카소입니다.


피카소 생가 앞에 있는 그의 동상, 말라가


제목 사진: 피카소 박물관,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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