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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0. 2023

천년의 고도 톨레도

도시 전체가 시간의 박물관

주말이면 있던 곳을 벗어나 근교에서 바람을 쐬고 싶어 집니다. 스페인의 서울인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만 내려가면 전혀 다른 얼굴을 지닌 또 다른 스페인을 마주합니다. 천년의 고도 톨레도가 바로 그곳입니다. 육중한 화강암의 회색빛 마드리드에서 건초더미를 퍼놓은 듯한 황톳빛 흙담과 적벽돌의 건물로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 중세의 도시, 톨레도!


어서 와, 톨레도는 처음이지?


전 세계를 하나로 포맷했던 로마도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그들은 1000km도 넘게 흐르는 따호 강이 도시의 삼면을 에워싸 천연의 요새로 입지를 굳힌 것을 보고 '똘레뚬 Toletvm, 언덕'이라 명명했습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양지바른 언덕 마을은 게르만계 서고트족의 톨레도란 왕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강력한 제왕을 갖추지 못한 서고트는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무어인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서고트를 삼킨 무어인 또한 내분에 휘말려 결국 1085년에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용맹왕 알폰소 6세 (Alfonso VI, El Bravo)에게 톨레도를 다시 넘기고 말지요. 머나먼 서쪽 땅에서도 역사는 돌고 도는가 봐요. 이후 무적함대의 펠리페 2세가 1561년 마드리드로 천도하기 전까지 톨레도는 무려 천년 간 수도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수도였으니 치열한 접전이 이어져 왔겠지요. 그래서 칼, 창과 같은 무기가 발달했답니다. 지금도 반지의 제왕과 왕좌의 게임을 테마로 톨레도 구시가지 내 매장들마다 다양한 크기의 멋진 장식용 칼을 전시한 걸 볼 수 있어요. 톨레도의 멋스러움은 아랍의 영향 하에 발달했던 금은상감 장식품, 다마스키나도 Damasquinado에서도 보입니다.


화려한 금세공 다마스키나도와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칼


다마스키나도는 교회에 열심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이름으로 다메섹 이란 지명에서 나왔습니다. 네, 맞습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를 만나고서 회심하고 바울로 개명한 곳이요.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의 성경 지명이 다메섹이에요.


그 지역의 주요 산업이 검 제작과 금속세공 등의 수공업이었어요. 지금도 톨레도의 고급 기념품 매장에는 확대경을 낀 백인 장인들이 각종 연장으로 그릇의 홈을 파고 금실을 촘촘히 넣고 있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거죠. 그걸 보고나니 비로소 우리들의 여행이란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시간의 이동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행정적 수도라면 톨레도는 종교상 수도입니다. 가톨릭의 나라답게 스페인에는 각 도시마다 주교가 관할하는 대성당이 하나씩 있어요 (때로는 살라망카처럼 두 곳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곳 톨레도에는 대주교 (또는 수석대주교)를 모신 수석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규모로 치면 스페인에서 제일 큰 세비야 대성당 면적의 3/5 정도고요, 역사적으로도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보다 280여 년이나 늦게 지어졌어요. 그래도 1227년에 시작해 1493년에 완공되었으니 500년 이상의 역사가 흐르고 있지요. 건축물 자체로서는 스페인의 여타 대성당에 밀리지만 수석 대주교님이 계시기에 가톨릭의 중요 회의는 이곳 톨레도에서 열린답니다.


톨레도의 수석 대성당 외관


1986년에 톨레도의 구시가지는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마다 스토리텔링이 줄을 잇고, 성벽 구석구석 먼지가 앉은 적벽돌의 잔해가 도시를 감싸고 있는 톨레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도시가 올려질 수 있을까요.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와 총알배송으로 대부분의 일처리를 하루 안에 해결하는 우리에게 톨레도는 눈에 밟히는 곳마다 사극 촬영현장입니다. 차의 옆 거울을 접고 달려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 울룩불룩 지압이 되다 못해 욱신거리는 거리 바닥, 식료품 하나 사려면 오르내리막길을 몇 번을 거쳐야 하는지요. 불편함이 일상이 된 나머지 편리함이 어색하다는 게 믿어지시나요. 이런 역설은 이곳에 와야지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밖으로 나와 보니 톨레도란 숲은 거대한 중세의 박물관입니다. 흘러야 할 도시의 역사는 타호 강이 둘러 싸면서 시간을 가두었습니다. 멈춘 시계태엽에 사람들은 속도감을 잃어버렸습니다. 발전이 사라진 그들의 일상은 외지인인 제가 보기에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들과는 비할 수 없이 빠른 일처리로 빨라진 만큼 더 많은 일로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사는, 아니, 바쁘게만 사는 우리의 모순된 일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일의 양은 많아지고, 과부하가 걸린 일을 처리하는 건 간단히 몇 번의 터치로 대신합니다. 상세한 말과 글은 지루해졌지요. 설명이 조금만 길어져도, 진지함을 보여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보다 설명충이니 진지충이니 하며 비하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문자를 주고받을 땐 짧은 단어, 그 마저도 초성으로 아니면 이모티콘으로 대신하지요.


이모티콘을 쓰는 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에요.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이모티콘이 더 적절하게 내 감정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 인정합니다. 다만, 제 감정 하나조차 제대로 된 말과 글로 표현 못하고 있다는 점이 스스로 답답하다는 얘기입니다. 


모임 현장에서 마주하는 상대방이 아닌 사각 스크린 안에 눈을 가두고, 잠시도 손가락을 멈추지 못하는 저를 보니, 정작 불행하게 사는 이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시간이 멈춘 저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겠지만, 적어도 "바쁘다 바빠"를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제가 잊지 말아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는 명확해졌습니다. 그건 바로 제가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천년의 고도 톨레도에서 가을 타는 고독한 이방인이 아닌 고매한 독자이자 작가가 되어 마음속 한 문장에 인생을 음미합니다.


톨레도 수석대성당 내부, 트란스파렌테 transparente
톨레도 시청에서 보는 대성당의 위용
톨레도 전경 석양


제목 사진: 톨레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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