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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11. 2023

돈키호테 풍차의 추억,
콘수에그라

톨레도에서 조금 더 내려가 봅니다. 톨레도를 지나자 주위의 풍광은 인적 드문 광활한 대지로 바뀝니다. 바싹 마른 가시덤불이 먼지를 일으키며 광활한 대지 위에서 휘잉 스치는 바람 소리에 이리저리 뒹굴거릴 것만 같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싶더니만, 그렇네요, 어렸을 적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서부 영화 한 장면이 겹칩니다. 이윽고 오와 열을 맞춘 올리브 나무 묘목이 등장합니다.   


넓디넓은 저 들판을 보며 옛날 사람들은 뭐라 느꼈을까요.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과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밭노동의 현장에서 감사와 동시에 두려움이 들지 않았을까요. 사람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이곳은 스페인(에서 어찌 보면 유일하게 알려진) 문학, <돈 키호테> (본제목은 <라 만차의 재기 발랄한 시골기사, 돈 키호테>입니다)의 배경이 되는 '카스티야 라 만차' 지방입니다. 


카스티야 Castilla는 단단한 성城, 라 만차 La Mancha는 얼룩이란 뜻의 스페인어입니다. 카스티야 왕국의 땅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성城이 많았으며, 넓은 대지는 황토, 적토, 휴경지 등의 땅과 올리브, 아몬드, 유채, 사프란 (섬유유연제 샤프란 아님 주의!)  등 여러 열매나무와 꽃들로 얼룩덜룩해 보였을 테니, 이름 그대로 성과 얼룩의 땅이라 할 만도 하지요.


소설 속 주인공 돈 키호테를 찾는 여정이 카스티야 라 만차의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집니다. 현대인은 과거의 그를 찾아 떠나고, 이미 지나간 그는 숨바꼭질하듯 조금씩 흔적을 남깁니다. 돈키호테의 주막인 푸에르토 라피세에도 가보고, 돈 키호테의 상상 속 연인 둘시네아의 마을인 엘 토보소에도 들려봅니다. 어디를 가든 카스티야 라 만차에서는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오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돈 키호테의 풍차 마을입니다. 멀리서 열두 개의 풍차가 보입니다. 큼직한 흑판용 하얀 분필이 나란히 산의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어요. 스페인 여염집이 얼기설기 있는 시골 마을 이름은, 콘수에그라, 일명 돈 키호테의 풍차 마을입니다.


콘수에그라 풍차 중 하나, 루시오. 풍차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이름이 있다.


김삿갓의 파자시처럼 잠시 파자(破字)를 해 볼까요. 꼰/콘 Con은 ‘함께’란 뜻이고, 수에그라 Suegra는 '시어머니' 또는 '장모'를 뜻하니,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동네...라는 걸까요? 그럴 리가요, 아재개그일 뿐이죠. 스페인에서는 삼대가 주말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는 일이 흔하다 해도, 모시고 사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각박해서가 아니라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압니다. 


본인의 건강상태가 정정한 이상, 자신이 하고픈 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지요. 광고에서 보듯, 여기서도 손주는 예쁘지만 안 오면 더 예쁜 존재인 걸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납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서건 비슷하다는 점에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풍차를 찾아보러 올라가 보니 걸어서 가긴 좀 힘겨운 길입니다. 그렇다고 차로 가기가 딱히 편하게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길이 워낙 좁은 터라, 대형버스 기사들의 미간엔 내 천(川) 자가 그어질 법한데 얄미울 정도로 휘파람 불며 잘 넘어갑니다.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좀 기다리며 넘깁니다. 덕분에 마음 졸이는 건 언제나 제 몫이에요. 유럽에 십 년을 넘게 살아도 여전히 뼛속까지 스며있는 '빨리빨리' 강박증은 쉬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풍차들이 주욱 늘어선 꼭대기에 올라와 보니 바람이 야무지게 머리칼을 휘날립니다. 여성들의 산발한 머리털은 그들의 뺨을 가차 없이 갈겨댑니다. 비록 뺨을 갈길만큼의 머리길이는 되지 않지만, 아니 무슨 바람이 이렇게 세? 하며 투덜대려는 순간 이곳의 별명이 떠올랐습니다. 풍차 마을! 바람의 마을이라는 것을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그저 관광용에 불과하지만, 그 옛날엔 실제 방앗간 기능을 했습니다. 풍차의 날개를 돌리려면 태풍처럼 불어야 가능했겠지요. 아, 정정합니다. 왜냐하면 오래전 이 지역에 태풍이 실제 불은 적이 있는데, 그랬더니만 풍차의 지붕이 죄다 벗겨져 날아가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거든요.  


여기저기 긴 머리의 여인들은 벌써부터 광년(aka. 미x년)이 된 머리를 보며 숨도 못 쉰 채 깔깔댑니다. 초코파이 광고에선 말하지 않아도 안다더니만,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바람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웃음이 터지는가 봅니다. 아래 들판에선 때마침 거름이라도 한바탕 푸짐하게 뿌렸는지 평생가도 잊지 못할 고향의 냄새가 점막에서 향연을 이룹니다.


자연의 손질을 받은 사자머리 스타일이건, 식욕을 확 줄일 거름냄새건 간에 그래도 위에서 내려다보니, 땅과 하늘의 경계가 안 보이는 지평선이 펼쳐집니다. 손님들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맞선 돈 키호테가 되어 당당하고 멋진 자세를 취합니다. 시원한 바람 속에 너나없이 대장부가 되어 호쾌하게 가슴을 펴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듭니다. 




기사 코스프레에서 시작한 작품의 주인공 알론소 키하노는 돈 키호테를 만들었습니다. 돈 키호테는 또 하나의 자아였지요. 돈 키호테를 통해 키하노는 진정한 자아를 찾았습니다. 그건 탁상공론이 아니었지요. 직접 몸으로 부대끼고 실수투성이, 좌충우돌 속에 삶의 의미를 건져냈습니다. 돈 키호테를 찾아 떠난 카스티야 라 만차, 저마다 돈키호테의 마을이라며 내세운 이곳에 돈 키호테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흔적을 따라 발품 팔아가며 찾아간 제가 있을 따름이었지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환경에 매이지 않고 몇 번이고 깨지고 부서져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고야 마는 키호티즘의 태도는 스페인의 정신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유산이 되었습니다. 강자에겐 굽힘 없는 기상을, 약자에겐 사랑과 관용의 태도를 보이며, 문자 그대로 강강약약으로 행동한 돈 키호테의 모습. 그는 그저 깡마르고 괴팍한 노인이 아닌 세월만큼이나 가치 있게 쌓인 인품과 기백이 깃든 영혼이었습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닮고 싶은 자화상으로 빛나는 어르신이었습니다.


콘수에그라 풍차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


제목 사진: 한낮의 콘수에그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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