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40 구슬이 꿰어지다

화경化境, 고수의 길

by 상처입은치유자

인간의 상상력은

경험과 놀라우리만치 연결돼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을 그릴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으며

경험하지 못한 것의 실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이율배반적이게도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써

성장, 발전, 진화해왔으며


그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인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극대화된 능력으로

이성과 감성, 현실과 이상, 과학과 예술

모방과 창조, 논리와 느낌을 상호 보완하고

선과 악, 흑과 백, 0과 1, 옳고 그름의

이분법二分法적 경계선을 무너뜨려 버린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분별심分別心

(나눌 분, 다를 별)을 일으키지 않으니

상대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사조차

그를 얽맬 수 없어 자유롭고도 자유로우며


처음에 달성하려 했던 목적을 향한

지향성指向性(대상에 대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강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버리고 비우게 됨으로써

주위 환경과 자연스러운 조화調和를 이루어

화경化境(이를 화, 경지 경)의 경지에 이른다




비로소 모든 구슬이 꿰어졌으니

피아彼我의 구분없는 불이不二(둘이 아님)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보이고

구하지 않아도 얻으며

두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열리게 되니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지고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러워진다




뭔가를 표현하고 행동할 때에

어려운 말을 쓰거나 화려하게 꾸미는 건

실제론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어리석어 보이고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성인聖人과 대가大家들의 경지는

날씨가 추우면 닭은 나무위로 올라가고

오리는 물속에 숨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계한상수鷄寒上樹요, 압한하수鴨寒下水라)


상황에 구애 받지 않고 적절한 행동을 하면

그게 그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니

화경은 중용中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미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올랐고

넘어야 될 산도 없어지니

이젠 더 이상 배울 것도 경험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아서

한없이 자유로운 무위자연無爲自然조차도

할 일 없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이나

한낱 유희遊戱의 삶으로

변질되거나 전락해 버릴 수 있으니


항룡유회亢龍有悔(오르다 항, 뉘우칠 회)라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龍이

이젠 내려갈 길밖에 없음을 알고는 후회한다


인생이 무상하고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지면

침잠沈潛(가라앉아 드러나지 않음)의 늪에

천천히 그러나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분명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잡히지 않는

한 줄기 아지랑이처럼 손끝을 맴돈다




옛 성인들께서는 이러한 때부터는

정해진 길도 없고 답도 없으니

그저 자연을 벗하며 조용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고 충고한다


닭이 알을 품듯

호연지기를 품고 기르다 보면

시나브로 때가 숙성이 되고

그 때가 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알을 깨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해

굳이 깊은 산속을 찾을 필요 없고

속세를 떠나야만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다


승속僧俗(중 승, 속세 속)의 구분이 어디며

속세와 자연의 구분이 어디에 있을까


-상처입은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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