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이 외벽 유리에 비친 몸을 본다. 볼썽사납게 꽉 맞는 교복 치마를 당겨 내린다. 연기를 길게 뿜으며 생각한다. 이번 만우절은 아쉽게 됐네. 예나는 왜인지 금연 중이랬다. 교복 차림으로 나란히 담배 피우는 재미가 각별했는데. 헤비스모커의 같잖은 선언을 놀려줄 생각으로 문영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예나를 약올려줄 말은 끝없었다. 아, 역시 쌀쌀한 저녁에 피우는 게 맛있어, 내가 너한테 이 백해무익한 걸 배웠잖아, 너네 집 옥상에서, 지금 딱 그때 그 맛이다. 이쯤하면 예나는 잘근거리던 아랫입술을 뱉고, 말할지 모른다. 야, 줘봐.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문영에게 예나는 빤했다.
올해로 스물 셋이 된 문영과 예나는 오늘도 열여덟의 문영과 예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스물 둘, 스물 하나, 스물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들려준 가장 중요한 말들이 그때에 있기 때문에.
“문영아.”
예나의 목소리이다. 고개 돌린 문영은 예나 이름을 마주 부르지도, 손을 치켜 올리지도, 웃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일을 잊어버린다. 문영의 손에 들린 연초의 끝이 발갛게 타들어가다 하얗게 죽어 날아간다. 예나가 교복을 입지 않았다.
어깨 각이 살아 있는 재킷을, 그 아래로 와이드한 슬랙스를 입은 예나를 문영이 멀거니 본다. 문영의 꼭 끼는 치마 앞에서 예나의 바짓단이 부드럽게 나풀거린다.
*
그 옥상은 예나의 비상구였다. 예나는 그곳에서 문영을 기다렸다. 문영은 틀림없이 나타났다. 예나는 또 다시 벌어지고 만 새 비상사태를 문영에게 설명했다. 대부분 문영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학교에는 늘 예나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걸레라는, 거지라는, 도벽이 있다는, 허언증이라는. 거짓이거나 진실이었다.
어느 날은 20대 초반 되어 보이는 남자가 학교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다가 예나를 태워갔었다. 예나는 교문을 나서면서부터 큰 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오빠뿐 아니라 모두가 자기를 돌아볼 때까지 불러댔다. 그날 이후로 예나는 자주 지각했다. 아침마다 남자네 집에 들렀다 온다고 했다. 같은 반 애들은 서늘한 눈빛과 달콤한 목소리로 예나를 부추겼다. 진짜 진짜? 그래서? 아침마다 뭐하는데? 예나는 하소연하는 척 했다. 몰라 허리 아파 죽겠어. 애들은 예나에게 자꾸 다음 이야기를 물었다. 예나는 그의 페니스에 대해서, 신음에 대해서 떠들었다. 거짓말이었다. 예나는 아침마다 남자의 냉장고를 채워주러 갔다. 요리를 해놓고 왔다. 도어락에 이중 잠금이 걸려 있는 날은 문고리에 편의점 봉투만 걸어두고 왔다. 어찌 됐든 예나는 그런 식으로 음탕한 년이 됐다. 예나에게는 그편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대학생과 연애하는 척 심부름꾼 노릇하는 여자애가 되는 것보다는.
예나에게 더 나쁜 선택을 하게 하는 사람은 문영뿐이었다. 가십 없는 예나를 찾아오는 사람 또한 문영뿐이었고, 옥상에서만큼은 예나는 걸레도 거지도 정신병자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아무것도 아닌 것, 고통에 빠진 여자애가 될 수 있었다.
남자가 예나에게 선물을 바란다고 했다. 예나가 알바를 늘릴까 고민했다. 문영이 헤어지라고 말했다. 예나는 머뭇거렸다. 문영이 다시 말했다.
“애들한테는 섹스 너무 못해서 네가 찼다고 하면 되잖아. 제발 사귀어달라고 질척대는 게 웃겼다고.”
그날 바로 예나는 남자와 헤어졌다. 다음날 학교에서 예나는 많이 말했다. 애들은 예나가 더 많은 거짓말을 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호응했다. 그러고 뒤돌아서면 저이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비죽거렸다. 가뿐하게 예나를 떠났다. 늘 그랬다. 예나 주변은 아주 시끄러웠다가 완전히 적막했다. 예나에게 남은 것은 또 다시 옥상이었다. 문영이었다.
*
문영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예나를 뜯어본다. 잔머리 없이 매끈하게 빗긴 정수리, 은은한 광이 도는 광대, 촉촉하고 건강해 보이는 입술, 커피잔을 들 때마다 차르르 팔뚝을 흐르는 새틴 소재의 셔츠, 알이 작고 반짝이는 손목시계. 문영이 따지듯이 묻는다.
“웬 커피? 술 안 먹어?”
문영은 예나와 만우절에 마시는 술을 좋아한다. 취기가 오르면 꼭 반복되는 그 문장을 듣기를 기다린다.
‘문영아, 난 너 아니었으면 그때 벌써 죽었어. 너 없었으면 난 못 버텼어.’
교복을 입고 비척거리는 다 큰 예나, 외로웠던 날들 떠올리며 순식간에 외로워지는 예나, 문영을 붙들고 네가 나의 유일한 친구라 하는 예나, 연약한 가냘픈 가엾은 예나.
예나가 부드럽게 대답한다.
“나 회사 다녀. 평일엔 술 못 먹어.”
문영은 황당하다.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취업했다고? 어떻게?"
얘가 무슨 자격증을 땄던가. 학점이 높았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물은 적이 없었나. 예나가 입술을 떼다 말고 커피를 한 입 마신다. 문영은 농담하듯이 욱하듯이 베듯이 묻는다.
"너 또 어디 이상한 데 간 거 아니야?”
예나가 커피를 다시 마신다. 두 입, 세 입, 네 입. 튀어나오려는 문장이 완전히 삼켜질 때까지 마신다. 그리고 간단히 말한다.
“우리, 헤어지자.”
문영은 두 번 황당해진다. 뭘 헤어져? 사귄 적이 없는데. 예나가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재킷을 집어든다. 나가려는 건가? 이렇게 가겠다는 건가? 문영의 몸이 움찔거린다. 예나가 문영의 눈을 바로 보고 말한다.
“그럼 우리, 헤어진 거다?”
문영이 되받을 말을 잃는다. 애초부터 틀린 소리라 따질까, 내가 네 최악을 아는 게 이제 와 쪽팔리냐 달려들까, 너 같은 애 좋아해줄 사람 나밖에 없다 침 뱉을까, 거짓보다 더 나은 진실을 가지게 되니까 내가 필요 없냐 붙잡을까. 일어선 예나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문영아. 너 속옷 보여.”
엉덩이가 다 보이게 말려 올라간 치마 아래로 튀어나온 팬티, 문영의 시선이 거기 닿는 새에 예나가 돌아선다. 문영이 앞을 보면 예나는 없을 것이다. 이제야 예나에게 되물을 말이 생각난다.
‘야, 뭐야. 다 거짓말이지? 만우절 이벤트지?’
문영은 고개를 묻고 치마를 끌어내린다. 끌어내린 것을 다시 끌어내린다. 다시, 또 다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