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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ul 25. 2021

그 날의 계절, 그 날의 기분

언젠가, 조명을 틀지 않아 한가득 어스름이 내려앉은 거실에서 내가 말했다.


"우리, 태안 한 번 가보는 건 어때? 들를 곳이 있거든."


창을 타고 바람이 들어오면서 자꾸만 애인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때마다 눈썹이 힐끗 드러났다 사라졌다. 애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고, 그러고 보니 태안은 한 번도 함께 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나른한 평일 오전이었고, 날씨는 대체로 흐릿했다. 태안은 그리 멀지 않았다. 성수기가 제법 지났음에도, 예상보다 관광객들이 많아 놀랐다. 바닷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확실히 육지에서 맞는 바람과는 그 세기가 달랐다. 비로소 바다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 말소리에 반쯤 파도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우리는 그 소리에 집중한 채 잠시 주변을 거닐었다. 마음에 각별한 사연 하나를 묻어둔 사람처럼,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정처 없이 그렇게.



내가 태안을 찾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애인과 이곳에 다시 꼭 오고 싶었다. 처음 태안에 온 것은 두 해전 겨울이었고, 취재차였다. 막연한 불안감에 몸서리치던. 내겐 유독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일상이 불규칙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 직업에 관해서든, 금전적인 보상에 관해서든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루하루가 마치 난해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쉬이 와닿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고, 그 무의미함 속에서 각별한 의미를 건져내려 애썼다.


그 무렵, 나는 고민이 깊어지자 어느 순간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두고, 차악의 선택지를 찾느라 밤을 새웠다. 내게 닥칠 위험 요소가 무엇인지 미리 파악해놓지 않으면 하루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가올 불행을 사전에 염두에 두고, 대비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런 시절, 그런 마음과 기분으로 떠난 태안이었다. 새해 첫 취재였다.


 당시, 태안은 영하를 웃도는 날씨였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태연하게 굴을 캐고, 낚싯대를 걸었다. 철새가 드물게 비쳤고, 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썰물은 벽면에 제 물 자국을 드리우며 얕고 천천히 빠져나갔다. 바닷물이 제법 빠지자 수심에 가려졌던 맨땅과 함께 어민들이 터놓은 물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해가 기울며 열꽃처럼 노을이 졌고, 나는 불안했다. 내가 취재를 하기로 예정했던 철새는 예상한 것과 달리 터무니없이 초라했다. 남겨진 낙곡이 많지 않은 것인지 철새는 논에 발을 오래 붙이지 않았다. 어젯밤 밤새 그려놓은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장의 취재를 진행하면서도, 나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사전 기획과는 조금 차질이 있었지만, 이렇다 할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 취재지는 간월도였는데, 물때가 맞아야만 간월암으로 드는 길이 열리는 터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서둘러 향한 간월도에선 다행히 마음을 놓았다. 관광객도 제법 많았고, 무엇보다 운치가 있었다.


 새해 초, 간월암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들 종이에 소원을 담아 적느라 바빠 보였다. 절 한쪽에선 소원이 적힌 흰 종이가 일제히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소원을 적느라 찬 바람에 보풀처럼 튼 손이며, 붉다 못해 옅은 보랏빛을 띤 노을, 하얗게 번지던 입김, 일렁이는 바다의 표면 같은 것들을 그저 한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외로움을 느꼈다. 어딘가 소외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컴컴한 불안감 속에서도 비어져 나오는 감동 때문인지, 그저 평소 감기처럼 들던 마음의 허기가 느닷없이 찾아온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없이 커져가던 감정의 기복만이 선명하다. 그 기이한 감정의 무늬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애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날의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불안한 마음을 비집고 눈에 들어오던 아름다움. 그 날의 날씨, 계절 같은 것들. 가능하다면 출처를 알 수 없는, 다만 사무치게 휩싸였던 그 날의 기분까지도.


근처 식당에서 한 끼를 때우곤 우리는 간월도로 향했다. 노을이 질 무렵이었고, 바닷바람은 여전히 드세게 불어왔다. 간월도 초입에 다다라서는 마주쳤던 풍경을 다시 한번 보는듯한 기시감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물때가 맞지 않은 탓인지, 물길은 수심에 가라앉아 비치질 않았다. 다급한 내 마음과 달리, 한참을 기다려도 바닷물은 도저히 빠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노을만 차츰 짙어지며 사방에 어스름을 채우고 있었다. 애인은 그런 내 심정을 이해했던지, 바다 한가운데에 섬처럼 떠 있는 간월암을 보곤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겐 지극히 볼품없는 광경이었다. 보여주고 싶은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간만 어김없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근처 항구를 서성였다. 해풍에 잘 말라가는 생선이며, 맥없이 몸을 기우는 배, 소쿠리에 담긴 해산물 같은 것을 감상하다, 전어 굽는 냄새를 옷에 밸 정도로 가득 맡고는 끝내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 날의 취재 이야기를 반복해 들려주었다. 애인은 나를 달래듯 가만히 들으며 지긋이 웃어보였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극적이게 아름답던 순간을 전해주고 싶었다. 내가 왜 그 모양이었는지, 무엇이 나를 그토록 난데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 것인지는 아무렴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한없이 가라앉던 기분, 가라앉던 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라앉던 마음. 단지, 그 혹사되는 감정 속에서도 희석되거나 중화되지 않던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특유의 감식안으로만 식별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어둠에 길들여진 눈(目)이 여분의 빛을 받아들이듯, 하나의 풍경이 오직 자신에게만 선명히 다가오는. 말로 수렴되지는 않지만, 또렷하게 인식되는. 그날의 아름다움은 분명 그런 것이었다. 매번 찾아오는 겨울이고, 대체로 흔한 풍경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와도 나눌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그런 감정에서만 이식되는 아름다움이 그 순간에는 분명 존재했다. 언제쯤 우리가 함께 그 날의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당신에게 있어, 또 나에게 있어 그런 극적인 순간이 다시 찾아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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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에세이와 소설을 씁니다.

E-mail : sks939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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