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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ul 30. 2021

새해에는 유서를 썼어요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시간은 평일 늦은 오후였다. 해가 거의 저물 즈음이었고, 허락된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우선 준비된 장소에서, 미리 준비해 둔 포즈로 사진을 촬영했다. 그가 능숙하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입 끝을 슬쩍 올리고 다시 오므릴 때마다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인상이 푸근한 사람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곤 먼저 근황을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그가 외부에서 어떤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지가 아닌 그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가 말했다. 새해 들어 유서를 쓰기 시작했어요. 유서요? 네, 유서요.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말한 유서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끝을 얘기할 때 그 시작을 상기하듯, 죽음의 반작용으로 삶을 되돌아보았다는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아주 사실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에 의해 벌어지게 될 어떤 상황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치 곧 죽을 사람인 양.



 죽고 싶다는 말이 죽음과 무관하듯,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죽음을 원한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가 말하는 유서는 무척 구체적이어서 꼭 눈앞의 죽음을 상정해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새해에 떠올리는 죽음은 뭔가 어울리지 않네요. 내가 말하자 그가 얘기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그의 말은 마치 죽음이 내게 건네는 첫인사 같았다. 그간 무탈하게 살아왔던 내 삶이 돌연 위태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는 잘 웃고, 때로는 분노했다. 그의 표현은 종종 시적이기까지 해서, 어느 땐 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저만의 모국어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알아 들을 순 없으나 이해할 수 있는.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조금은 넓고 깊은, 그런 말들. 내가 건네는 평이한 질문들이 선뜻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날 저녁. 녹취록을 듣는데 그의 첫 문장에서 한참을 나아가지 못했다. 유서를 쓰기 시작했어요. 유서요? 네, 유서요. 이어서, 그가 유서의 간략한 내용과 항목들을 친절히 일러주었다. 마침, 불면증에 시달리던 차였고, 밤은 아직 오래 남아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말대로 유서의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만약에 죽는다면.


나는 내 죽음을 상상했다. 하지만, 나는 내 죽음이 실감 나지 않을뿐더러, 별다른 감흥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내게 있어 죽음이란 생에서 일어나는 가장 부당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짓누르는, 모든 것을 무화하는 죽음은 삶에서 철저히 배제된 일처럼 여겨졌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어디까지나 죽음의 반대편에 선 사람일 것이므로, 결국 죽음에 관한 말 역시 삶의 또 다른 감상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할 순 있을지언정, 죽음 자체는 내게 온전히 감각되지 않았다.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불현듯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 순간엔 죽음이 없다면 삶도 존재하지 않을 거란 그럴듯한 반어적인 위로도 영 와닿지 않았다. 어째서 죽음은 그토록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인지, 가깝고도 적대적인지.



그러고 보니,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거예요.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지만,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말만 깊게 박힌 모양인지 저 문장만 또렷하다. 죽음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 만약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 삶은 영영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말이었을까.


녹음된 대화가 이어 흘러나온다. 표로 작성해서 꼼꼼히 정리해둬요. 이어서 내가 놀라 묻는다. 엄청 세세하게 작성하시는군요. 그럼요, 그렇게 해야 해요.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에, 나는 떠오르는 대로 이름 몇 자를 적어 내려간다. 이름을 적으며 발음하는 것과 쓰는 일이 전혀 다른 것임을 체감한다. 이름은 분명 각자의 것이지만, 어느 이름은 꼭 내가 붙여놓은 별명 같고, 또 어떤 이름을 쓰면서는 잘못 적은 것 같은 어색함을 느낀다.


 혼자서 의연하게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 생각했건만, 내게 엮인 이름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그 이름이 모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점도. 이름을 한 자씩 적어 내려가는데, 이름에 묻은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어렴풋이 감각되는 얼굴의 표정이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얼굴은 젊은 낯빛을 하고 있고, 어느 얼굴은 흐릿해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럴 때 내 몸은 여러 사람이 스치고, 지나가고, 경유하고, 때로는 머물다가 가는 하나의 둥지가 된 기분이 든다. 이름의 한 획을 긋다 그가 내게 쥐여준 말을 떠올린다. 또 다른 이름의 받침을 적을 적에는 미간을 한껏 좁히며 울던 그의 표정이 눈에 집히고, 한 이름을 마저 다 쓰고는 이 밤, 당신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는 이내 말을 적는다. 내 삶의 테두리 안에 여러 표정으로 얼굴을 내민 이름들에게 영양가 없는 말을 건넨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쓴 말들은 하나같이 무겁다. 단어 하나하나에 온점은 붙은 것처럼, 말이 굳는 느낌이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마지막 말들이라 그런지도. 어떤 말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꼭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더이상 미루어선 안 되는 때가 있다. 죽음 앞에서 대부분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죽음은 저 가장 밑바닥의 소실점까지도 돌아보게끔 만든다.



피로하고 긴 밤, 나는 녹취록을 5분 남짓 들어놓곤 온종일 유서만 썼다. 죽고 싶다는 말이 죽겠다는 말이 아니듯,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은 실제 죽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말일 테지만. 삶의 범위 안에서 말하는 죽음은 결국 삶으로 되돌아가고는 경유지가 되고야 만다. 나는 여태껏 관계의 밖을 떠돌며 외롭게 살아왔다고 믿어왔건만, 실은 편애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디로든 떠날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덧없고 쓸쓸할 거란 생각을 한다.


가까스로 짚이는 이름과 얼굴을 적어본다. 그 이름이, 이 얼굴이 맞던가 의심하고, 또 얼굴은 또렷한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보면서. 어느 사인가 삶의 어깨가 어긋난 사람들, 어떻게 맺어지고 끊어진 지도 모르는 관계들, 누가 남고 떠났는지 모호한 순간들, 변덕 같은 마음들, 이제는 화해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는 먼 과거의 사연까지 이름에 하나둘 엉겨 붙는다. 때로는 우습고, 대체로 슬프다. 그리고 드물게 아름답다. 그렇게 남은 밤, 분실된 이름을 얼마간 더 헤아려본다. 죽음이 조금 미지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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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에세이와 소설을 씁니다.

E-mail : sks939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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