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 게 참 재밌다. 한국에서 매해 첫날 목표로 영어공부를 넣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겨울이 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 때부터, 요즘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의무교육으로 실시되어 10년 넘게 배우건만 여전히 영어는 전 국민의 숙제이다. 우리가 영어를 못 하는 건 쓸 기회가 많이 없어서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다들 쉽게 언어를 배울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디서 배우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자주 노출되고 자주 사용해야 하니 집중적으로 익힐 기회가 있을 뿐이다.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났다. 겨울방학이라고 부르기도 뭐 한 2주 남짓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고 나면 1월 6일부터 아이들의 봄학기가 시작한다. 약 4개월. 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집중적으로 언어 노출이 된 아이들의 언어실력은 과연 얼마나 늘었는가.
환경을 만들어주면 언어는 알아서 늘 거라는 기대가 착각임을 겨울은 깨달았다. 한국에서 거의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던 탓일까? 아이들이 선명하게 내뱉기 시작한 말은 다름 아닌 No였다. 가는 길을 가로막거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아가거나 옷을 잡아당길 때, 말이 짧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큰 소리로 No를 외치는 거였다. Hi, goodbye, Can I help you?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씩 늘긴 했지만 너무 더뎠다. 말을 못 한다고 의기소침하게 구석에 있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가끔 하굣길에 친구들과 하는 대화를 보면 마음속으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문장은 거의 없이 각종 의성어, 의태어, 감탄사에 바디랭귀지뿐이었다.
언어는 겨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보였다.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제일 짧다는 동지. 동지가 가까워질 때면 되려 안도의 탄식이 나온다. 뜨다 말고 지는 해. 칠흑처럼 어두운 오후 3시. 이게 곧 끝남을 아는 탓이다. 아이들 겨울방학과 함께 동지가 지나고 봄학기가 시작하자 끝없던 어둠이 조금씩 자신의 세력을 잃었다. 낮이 무서운 속도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은 무사히 이번 겨울을 보냈음에 또 한 번 안도했다.
겨울에 밤이 길었던 만큼 여름에는 낮이 길어졌다. 서머타임이 시작하는 3월 마지막 일요일이 되자 해 지는 시간도 한 시간 늦어졌다. 하루에 몇 분씩 낮이 무섭게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금세 하지가 가까워질 것이다. 밤 10시쯤 남색빛으로 변하기 시작한 하늘이 채 까맣게 변하기도 전에 다시 해가 뜨겠지. 새벽 3시에 새가 지저귀기기 시작하며 동이 틀 것이고 말이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텅텅 비었던 거리에 사람들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한다.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간 유럽 여행이 겹쳐 보였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풍경이 어찌나 여유롭고 운치 있어 보이던지. 여기도 해가 좋은 날에는 도로의 절반을 점령한 야외 테이블에 커피나 맥주를 한잔 놓고 해를 쬐는 사람들이 꽉 차 있다. 공원에는 자기 몸만 한 큰 수건을 바닥에 깔고 태닝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처음 왔을 때는 풀밭에 비키니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누워 있는 사람들이 낯설었다. 해만 좋을 뿐이지 온도는 20도를 넘을까 말까. 그 정도면 한국의 봄 날씨였다. 첫 번째 겨울을 난 뒤 겨울은 코끝이 시려도 해만 나오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이해했고, 두 번째 겨울을 보내고 나자, 그 사람들 속에 있게 되었다.
4월, 수업이 끝나니 시계가 12시를 가리켰다. 스톡홀름의 4월은 아직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을 볼 수 있는 달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해가 쨍쨍했다. 같이 수업을 듣던 동기들과 강의실을 나와 건물 중앙에 난 열린 계단을 올라 식당을 향했다. 새로 지어진 건물인 덕분에 식당도 인테리어가 꽤 멋졌다. 외곽으로 나가는 왕복 6차선 도로를 바라보고 있어 경치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내부만 보면 꽤 분위기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보였다. 식당에는 커다란 테라스로 연결되었다. 조금 황량해 보이는 테라스에는 야외 식탁과 의자들이 보였다.
오늘 날씨 좋은데 밖으로 나가서 먹자.
누군가의 제안에 모두들 쟁반을 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의자 앉아 테이블에 음식이 든 접시와 차가 든 컵이 든 쟁반을 내렸다. 아직 공기가 찼다. 늘 입던 패딩 대신 오랜만에 꺼내 입은 코트의 깃을 세우고 앞섶을 한 번 더 여몄다.
날씨 너무 좋다!!
유럽에서 온 아이들은 신이 났다. 독일만 해도 길고 어두운 겨울에 익숙했다. 그래서 해에 대한 간절함에 있어서는 스웨덴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우연히 옆에 앉게 된 방글라데시 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근데 너무 춥지 않아?라고 물었다. 겨울도 웃으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찬 공기 탓에 찻잔은 금세 미지근해졌다. 더 차가워지기 전에 빨리 밥을 먹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겨울은 빠르게 포크를 움직였다. 접시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겨울은 본인처럼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아이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우린 안에 들어가서 커피 마시고 있을게. 너희도 다 먹고 들어와.
바지 안에 레깅스를 하나 더 입고, 목폴라 안에 히트텍을 챙겨 입고 카디건까지 걸쳤건만, 겨울에게 10도 안 되는 날씨에 야외 식사는 무리였다. 먹은 것들을 퇴식구에 정리하고 나오는 길에 휴지를 빼서 훌쩍이는 코를 풀었다. 아까 먹던 찻잔에 다시 뜨거운 물을 받아 티백을 넣는다. 다른 동기들이 보이는 큰 창 옆 있는 낮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 남아 있던 아이들도 들어와 먹은 음식을 치우고 옆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