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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Dec 12. 2024

늦깎이 유학생

유예기간 1

겨울이 있는 계단식 강의실은 두 층을 합해서 만든 듯 층고가 높았다. 중간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마치 주인공이 교수인 원맨쇼를 보는 듯했다. 아직 완전히 공사를 마치지 못한 새 캠퍼스 외부는 포클레인과 트럭, 자갈등이 여기저기 있었다. 겨울이 듣는 강의실이 있는 건물 안은 모두 공사를 마친 뒤였다. 겨울이 앉아 있는 청록빛 융이 붙어 있는 접이식 의자 그리고 앞의자에 붙어 있는 나무색 간이 책상도 바래지 않은 본디의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의자 사이에 있는 콘센트가 낯설었다. 겨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수업시간에 노트북을 가지고 오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공책을 펴고 필기를 했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대학교 강의실에서는 노트북이나 패드가 없는 학생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겨울이 다니는 대학원은 모든 수업은 스웨덴어 대신 영어로 했다. 아마 스웨덴어로 했다면 겨울이 들어가지 못했으리라. 지난번에 스웨덴에 왔을 때는 잠깐 맛본 스웨덴어는 å, ä, ö 때문에 모든 글씨를 외계어처럼 보이게 했다. 화가 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강한 어조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스웨덴어를 배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스웨덴어는 영어와 독일어 중간 느낌이라고 했지만, 학창 시절 겨울의 제2외국어는 중국어였다.


하지만 영어로 한다고 해도 쉽지는 않았다. 겨울 인생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영어를 들었던 때가 있었던가? 차라리 교수가 파워포인트를 띄워놓고 강의를 할 때는 좀 더 나았다. 조금 못 알아듣더라도 파워포인트를 보면 내용을 눈치챌 수 있으니. 종종 파워포인트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는 구글번역기의 사진기 모양을 눌러 화면 전체를 번역하곤 했다. 한글로 읽으면 왜 헤맸나 싶었다. 학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필드에서 십 년 넘게 마케팅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개념의 이름은 모를지언정 내용을 들으면 떠오르는 생생한 예들이 않았다. 하지만, 같이 듣던 학생들이 질문을 하거나, 교수가 질문을 해서 다른 학생들이 대답을 하기 시작하면 끝없는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오롯이 리스닝만으로 판단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묻는 한국교수와 달리 여기는 학생의 의견이나 경험을 듣기 위한 질문을 많이 했다. 주저할 법도 한데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유창한 영어로 길게 답변을 했다. 학생들도 어찌나 궁금한 게 많은지, 끝날 때나 질문하는 한국 학생들과 달리 여기는 중간중간 계속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럴 때면 겨울은 머릿속으로 저녁은 뭘 먹을지, 장은 뭘 봐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쉼 없이 교수님 말씀을 받아 적으며 질문에 답하던 모범생 겨울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혹시라도 대답을 시킬까 봐, 질문만 하면 겨울은 눈을 피해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수업과 수업 사이, 앞선 오리엔테이션과 몇 번의 모임으로 낯이 익은 같은 과의 학생들과 점심을 먹을 때면 겨울은 더 말이 없어졌다. 지난주에 뭐 했어로 시작하는 스몰토크는 겨울도 모르게 가짜미소를 띠게 했다. 대부분은 이십 대 중반인 동기들. 회사로 치면 갓 회사에 들어왔을 신입사원과 뭘 그리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겠는가.


같은 팀 선영 대리는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했었다. 겨울도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몇 번 뮤지컬을 본 적이 있었지만, 선영대리처럼 출연진이 바뀌었다고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볼 정도로 뮤지컬덕후는 아니었다. 혜원 씨는 좋아하는 아이돌 해외공연을 보러 휴가일정을 맞춘다고 했다. 러닝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3번씩 러닝크루들과 한강을 뛰다는 영업팀 사원까지.. 기저귀 뗀 둘째가 화장실이 급해서 밖에 들고뛴 이야기나, 치과에 갔는데 아이 이가 썩어서 25만 원 주고 크라운 씌운 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겨울에게는 같은 처지의 동년배 직원들과 점심이 훨씬 편했다. 같은 한국에서 살았어도 차이가 나는데 여기서 만나는 동기들은 스웨덴, 독일, 핀란드 등 출신국도 다양했다.


영어는 왜 이렇게 잘 안 나오는지, 가끔 말하고 싶은 주제가 나와도 버벅거리다가 넘어가기 일쑤였다. 가끔 이런 겨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인내심이 강한 동기들과 같은 테이블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배려심 넘치는 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그그… 단어가 뭐였지?”라고 하는 겨울 덕분에 갑자기 낱말 맞추기 시간으로 변하곤 했다.


대학원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 나라 대학교육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수업에는 강의뿐 아니라 세미나 시간이 따로 있었다. 먼저 조를 나누어서 발표순서를 정했다. 정해진 조가 발표를 하면 조원들은 다른 조로 흩어져서 발표내용과 연결된 논의 주제를 알려주며 토론을 진행한다. 그런 뒤 토론 내용을 정리해서 전체에 발표해야 했다. 영어발표야 대본을 달달 외우면 된다지만, 토론을 진행하고 정리해서 발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논지를 이해하고 피드백하면서 토론을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다양한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 발표까지 해야 했다.


대학시절 이런 수업을 해본 적이 있었나? 경영학과이니만큼 조모임은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발표 후 질의응답이 끝이었다. 추가 토론 진행 따위는 없었다. 되려 회사에선 회의 진행을 많이 했었다. 비록 정해진 내용을 공부하고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뭘 할지 어떻게 할지에 관한 아이디어 회의이자 빵구난 매출을 어떻게 커버할지에 대한 대책회의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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