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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Dec 13. 2024

영어가 발목을 잡는다

유예기간 2

대학원이라서 그런지 읽어야 할 논문도 많았다. 첫 수업이었던 마케팅 이론 수업은 논문으로 시작해서 논문으로 끝나는 수업이었다. 1주일마다 5개의 논문을 읽어와서 토론을 한 뒤, 그동안 읽은 총 25개의 논문의 리뷰와 느낀 바를 1만 5천 단어 분량의 리포트에 써내야 했다. 익숙한 이름을 한 개념들은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인지 과도하다 싶게 안으로 들어가서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때 늘 고객 가치에 관한 이야기를 귀 아프게 들었지만, Value creation & capture을 학문적으로 파기 시작하니 뭔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말장난한다 싶기도 했다. 그냥 고객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불편한 걸 개선하고 더 큰 기쁨을 주도록. 근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지?


한글로 읽어도 뭔 소린가 싶은데 영어로 읽다 보니 자꾸 길을 잃었다. 1시간 동안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기도 했다. 긴 논문은 스무 페이지가 넘는데 이래선 수업 때 입도 떼지 못하겠다 싶어서, 결국 구글 번역기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한 페이지씩 긁어다가 번역기를 돌리는데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은지. 긁어오면서 이상해진 띄어쓰기를 고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막상 번역기로 돌리고 나서 한글로 된 걸 읽어보면 1시간도 안 걸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번역기를 의지해 논문을 읽다 보니 내용은 이해해도 영어로 말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한글로 내용이 들어있는 터라, 그때그때 번역해야 하는데 그에 매치되는 영어단어를 떠오르지 않는 탓이다. 그래서 어버버 하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번엔 진짜 영어로 읽어보겠다며 시도를 하건만, 매번 절반도 못 읽고 전 날 번역기를 돌리고 있었다.


비단 말하기만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식 영어교육의 특징이 무엇인가? 학교 시험이고 토익 토플이든 간에 문제 풀기에 최적화된 교육이 아니던가. 겨울은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교육을 받고 자라난 한국인이었다. 영어로 글만 쓰려고 하면 머릿속이 텅 비면서 끝없이 막막해졌다. 주어 뒤에 동사 하나를 써놓고 한참을 고민한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색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왠지 이 조합은 눈에 익지가 않다. 아무리 봐도 콩글리시 같다. 전치사를 넣을 때면 늘 고민이 된다. 여기에는 in이 맞을까 on이 맞을까? To 부정사, 동명사는 어떻고, 배운 내용들이 흔적 남아 헷갈리기만 할 뿐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또 번역기를 켠다. 한국어로 글을 쓰니 손가락들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춘다. 화수분처럼 솟아 나오는 단어들을 한참을 받아쓴다. 그러고 나서 번역기를 돌려 나온 문장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겨울은 한국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어가 생략 가능하다는 것임을 번역기를 쓰며 알게 되었다. 한글로 쓸 때는 전혀 어색하지 않던 문장들이 번역기를 거치고 나면 말도 안 되는 주어가 덧붙여져 엉망진창으로 변한다. 어쩔 때는 I였다가 you였다가 she였다 he였다 시점도 제각각이다. 문장이 좀 길어지면 이상하게 잘라서 두 문장으로 번역하기도 하기 때문에 문맥상 이상한 게 없는지도 유심히 봐야 한다. 바꾼 문장이 이상한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영문을 다시 한글로 번역해서 쓱 읽어본다. 마음에 드는 번역이 나올 때까지 역병역을 누르며 내용을 고친다. 크게 이상한 부분이 없어 보이면 비로소 보고서에 붙여 넣는다. 겨울이 쓴 건데 하나도 자신이 쓴 거 같지 않은 영문 보고서가 하나 생긴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읽다 보면, 겨울은 자신이 쓴 보고서를 읽으면서 또 길을 잃고 만다.


그나마 팀 보고서는 좀 낫다. 조에서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 전체적으로 문장을 읽으며 고쳐 놓은 탓이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 무언가 어색한 문장들이 눈에 익숙한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겨울이 쓴 게 아니니 정확히 무엇이 바뀐 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의 눈에도 바뀐 게 훨씬 나아 보인다. 그러니 더욱 스스로 영작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쓰는 문장이 문법실수투성이의 콩글리시일까 봐, 이상한 번역투의 문장일까 두려워 자꾸 작아져간다.


밤늦게까지 논문과 씨름하는 겨울을 보며 선우는 말을 건넨다.


잘 돼가?


아니, 아직도 한참 남았어.


논문 읽기가 어렵지?


내용이 어려운지는 잘 모르겠는데.. 영어로 읽는 게 너무 어렵네. 이게 마케팅 공부를 하는지 영어 공부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영어 때문에 오늘도 제대로 말고 못 하고 왔잖아.. 애들도 학교랑 어린이집에서 반벙어리로 있고.. 영어가 우리 가족 전체 발목을 잡고 있네.


말을 뱉으며 씩 웃는 선우를 바라보자 겨울도 논문을 읽다가 구겨진 인상 풀며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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