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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시진 Mar 21. 2024

일상이 무너졌다

집주소를 적어달라고요? 어떡하죠...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데요


평소처럼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좀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다시 또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시간 감각이 둔감해지고 정리정돈이 평소와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변이 어지럽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어느 정도 정리벽을 가진 성격인데 말이다.

자연스럽게도, 나는 현실에 있고 싶지 않은지 계속해서 잠을 청하고 싶다. 그래서 결국 또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렇다고 일찍 눈을 뜨지도 못하면서.


이런 날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건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기 형식은 아니고 그저 체크리스트 정도이다. 내 생활을 기록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일주일이 흘러가있고 기억나지 않는 일상이 꽤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실 지금은 증상이 많이 나아진 편이다.




난 이혼을 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유이고 또 달리 보면 평범하지 않은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본격적으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집을 구하고. 누군들 예상하겠냐만,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나도 내 인생에 이혼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우울증의 증상일 수도, 뇌가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1년을 돌아보았을 때 그저 힘들었구나만 떠오를 뿐이다.




그러한 계기로 정신건강의학과에 가기 위해 예약을 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어디에 간 건지도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처음 방문한 곳이었고, 인적사항을 적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성함, 연락처, 주소까지 적어주세요."


나는 잠시 멍했다. 아, 여기 적으면 되는구나.

이름을 적고 연락처를 적은 뒤에 내 행동은 더 느릿해졌다.


"......"


주소.

주소칸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주소가... 모르겠는데요."


주소가 기억나지 않았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가 태어났던 집의 주소까지 기억할 정도로 주소나 번호를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당시 살고 있는 집주소를 떠올리자 그저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이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핑계로 잠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마침 얼마 전 새로 발급받은 운전면허증이 떠올랐다. 나는 당황한 심정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면허증을 꺼내어 주소를 받아 적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무사히 주소를 적고 난 뒤에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 더 중요한 걸 잊어버리면 어쩌지? 나을 수 있는 건가?




"기억력 감퇴도 우울증의 증상입니다. 증상은 우울증이 치료되면서 차차 나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런 일 외에도 가족과 통화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사소한 것들을 잠시 망각하고 살았다. 물론 1년 반정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처럼 기억력도 많이 좋아졌고 그 외 증상들도 호전된 편이다.


그리고 약을 먹고 난 뒤에 행동을 돌이켜 보아 알게 된 증상들도 더러 있다. 식사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밥을 걸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무얼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잠을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굉장히 불규칙해졌다. 집에서 혼자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은 상태라 누구도 패턴이 망가진 이유가 우울증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 원래 일정하지 않게 자고,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씻는 일도 비슷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씻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거나 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밥도 잠도 씻는 것도. 그러니까 한마디로 일상생활이 전혀 안 됐다. 그걸 나는 약을 먹고서야 조금씩 깨달았다.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바로 고쳐지는 게 딱히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상태를 알고 모르고는 큰 차이가 있다. 내가 게으른 인간이라 자책하기 전에 우울증 때문에 일상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해야 치료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먹던 약을 바꾸었는데... 정말 원래 내가 이렇게 부지런했었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20대 초반에 에너지가 넘쳐서 생활을 잘했던 게 아니라, 우울증을 앓기 전에 원래의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바뀐 약이 다시 몸에 적응하고 있는지, 우울증이 약을 이겨내고 있다. 예전처럼 잠에서 1~2시간마다 깨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멍하게 시간을 흘리는 일이 조금 길어졌다. 다행인 건 내가 이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창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게 된 말이 있다. 누가 제일 처음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분께 아주 감사하다.


우울은 수용성이다.


내가 오늘 아침, 저녁으로 우울을 잘 씻어내었는지 점검한다. (정말로 씻는 걸 말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들어갔는지 다른 물건도 제자리에 있는지 돌아본다.

식사는 제시간에 했는지, 뭘 먹었는지 생각해 본다.


일상생활을 잘 해내기 위해 수용성인 우울을 씻어내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오늘을 잘 버텨낼 수 있고, 무사히 흘려보낼 수 있다.

나는 이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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