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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Jun 23. 2020

해 줄 수 있는 게 밥상 차려 주는 것 밖에 없다

내일부터 중간고사, 힘내라 아들아

어제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해가 조금 더 빨리 지고 밤이 더 먼저 찾아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시간은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 월급날, 주말, 아이들 등교와 방학, 남편의 야근과 출장과 같은 것들로 내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그 시간에 맞춰 밥상을 차려낸다. 내일은 고등학생 큰 아이의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내가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된다. 마음이 뻐근하게 애가 쓰인다. 오늘은 남편이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어서 두 아이만을 위한 저녁 밥상을 차린다. 남편이 없는 저녁 밥상은 소홀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은 소홀하지 않기로 한다. 뻐근하게 애 달은 마음의 긴장을 풀어, 내 아이가 먹고 힘이 나는 밥상을 차리기 위해 손을 깨끗이 씻고 저녁밥을 지었다.


아이들이 잘 먹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알맞게 맛이든 마늘과 마늘종 장아찌는 아예 꺼낼 생각도 않는다.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무생채 무침을 김치 대신 놓고, 어제저녁에 많이 끓여 따로 통에 담아 둔 순두부찌개도 데워 뚝배기가 아닌 컵모양 대접에 담아낸다. 손질해 냉장고에 넣어둔 가자미도 프라이팬에 바싹 구워내고, 데친 브로콜리를 잘게 다져 넣고 달걀말이를 한다. 이렇게 하면 작은 아이도 브로콜리를 잘 먹는다. 아이들이 즐겨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씩 한 번이라도 떠먹는 열무 물김치와 또 어쩌다 한 번씩 집어먹는 가지볶음도 눈치 보며 끄트머리에 슬쩍 밀어 놓는다. 나는 가자미 살을 발라 아이들의 밥 위에 올려준다. 그리고 큰 아이의 기분을 살피며 그 아이가 적당히 재미있어할 이야기로 시작해 시험공부를 독려하고픈 나의 당부는 짧게 끝내려고 애쓰며 밥상머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또 큰 아이의 눈치를 본다. 큰 아이가 까탈스럽지도 않은데 시험 공부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나는 이렇게 계속 눈치를 본다. 나의 저녁은 아이들의 식사가 끝나고 남아있는 물김치와 가지볶음으로 시작되겠지.


하지 무렵 장마가 오기 전 감자를 캔다고 했다. 그래서 그즈음에 캐는 감자를 하지 감자라고 한다고 텃밭을 하던 해 초보 농부 흉내를 내는 내게 먼저 그곳에서 농사를 짓던 분이 이야기해 주었다. 감자가 땅속에서 자랄 때 영양분을 온전히 열매에 주기 위해 하얀 감자꽃이 피면 꽃을 따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다른 곳에 영양을 뺏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마트에서 사 온 감자를 싹이 나도록 며칠을 뒷 베란다에 두었더니 올록볼록 싹이 났다. 싹이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감자를 조각 정도로 잘라 아이들과 함께 밭에 심었다. 텃밭을 하고 처음 심은 것이 감자였다. 한 이랑을 심은 감자는 바로 옆 이랑에 심어놓은 아직 어린 고춧대를 못살게 굴만큼 줄기가 퍼져 나갔다. 장마가 온다고 하니 드디어 감자를 캐러 갔다. 수확하는 기쁨을 오롯이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 나는 감자 한 알 캐지 않고 아이들이 보물찾기 하듯 감자를 캐며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땅 속에서 실하게 여문 감자를 집으로 가져와 감자 크로켓, 감자 샐러드, 감자튀김, 감자조림을 해 상위에 올릴 때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키워낸 열매라고. '애써 노력한 결과물을 즐기는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내 아이들이 알아가길 바랐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 또한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야만 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감자꽃은 예쁘지만 버려야 한다고.


그러나 자식은 내 맘과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고등학생이 된 큰 아이는 성적은 중간에 머물고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겠다', '1인 인터넷 방송을 하겠다' 하면서도 그것이 되기 위해 애쓰지도 않고 웹툰과 유튜브를 끼고 산다. 무슨 근거로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아이가 공부로 속을 썩일 줄은 몰랐다. 아이의 성적에 당황한 내가 공부에 강한 드라이브를 거니 아이가 괴로워하고 나와 아이 사이만 멀어지는 것 같다. 정말이지 웹툰과 유튜브를 만든 사람을 찾아가 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뭔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 위해 나의 모든 욕망을 접어 놓고 공부만 했었다. 대학에 가기만 하면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나를 다독여 열매에 집중하며 하얗게 피어나는 나의 감자꽃을 미련 없이 모두 꺾어 버렸는데 내 아이는 감자꽃에 집중하고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장마가 오는데, 이제 수확을 해야 할 시기가 곧 오는데......' 내 마음만 바쁘고 급하다.


엄마의 바쁘고 급한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큰 아이가 중간고사가 끝나면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따겠단다. 맙소사! 조주기능사 자격증이라니! 찾아보니 "조주에 관한 숙련기능을 가지고 조주 작업과 관련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자격제도"이고 국가 기술 자격시험이다. 그리고 고등학생도 응시가 가능하단다. 고등학생이 술 만드는 기술을 갖는 것을 국가가 인정해 주다니 정말로 충격이었다. 놀란 나에게 큰 아이가 "어머니, 고등학생에게 술을 파는 것은 불법이지만 고등학생이 술을 마시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술 만들어 마시겠다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능글맞게 그런 게 아니라 칵테일을 만드는 게 재미있어 보이고 신기하단다. 그러면서 칵테일에 들어가는 얼음을 직접 만드는 연습을 하겠다며 냉장고의 냉동실 온도를 조절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얼음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냐니까 기포가 없는 잘 녹지 않는 투명한 얼음이 필요하단다. 이미 뭔가 많은 것을 알아내고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한 듯한 아이의 진지한 태도를 보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 싶고 '얘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다. '이 아이가 내가 낳고 18년 동안 기른 아이가 맞나?'싶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가 너무 알코올 프렌들리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핸드드립 커피 내리는 것을 학교 동아리에서 배워 온 큰 아이가 작년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겠다고 해서 남편이 직구로 호주산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나중에 따도 되는 것이니 일단은 네가 만들고 싶은 라테를 실컷 만들어 보라고. 그렇게 바리스타 자격증 자격증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매일 우유 거품으로 하트 만드는 것에 싫증이 났는지 요즘은 시들하다. 덕분에 매일 아침 아들이 내려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내 입만 고급이 되었다. 이번 조주기능사 자격증도 그런 맥락으로 '알겠으니 중간고사가 끝나면 필기시험부터 공부해 보라'라고 말하고 중간고사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아이와 딜을 했다. 그리고 희망한다. 아이가 칵테일 만드는 것에 싫증을 느껴 결국 나의 칵테일 취향만 고급이 되는 것을.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바뀐다. '그래, 뭐라도 되겠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지.'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그럴듯한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다가 '나의 십 대와는 다른 시대에 십 대 이십 대를 보내는 아이에게 내가 너무 "라떼는... ...."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대신 공부를 해 줄 수도 없고, 대신 인생의 결정을 내려줄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힘내서 하라고 밥상을 차려주는 일뿐인 듯싶다. 내일 낮이 조금 더 짧아지고 밤이 그만큼 길어질 것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지듯이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내 아이 걱정으로 애가 쓰일 것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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