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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Aug 10. 2020

해장국에 소주 한 병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집에 가기 싫어서

봄날 아침이었다. 나는 여덟 살이었고, 남동생은 여섯 살이었다. 마당의 감나무에서는 감꽃이 노랗게 매달려 있었고 일요일 아침의 여유로운 정적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먼저 엉엉 울었고 내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동생이 나를 따라 같이 울었다. 울음은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파란색 고무 슬리퍼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동생과 나는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마루로 나가 엄마를 확인하고도 계속 울었다. 엄마는 머리에 이고 있던 이불빨래를 담은 큰 빨래통을 내리고 왜 우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어도 울음이 멈추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 뚝 그치라고 부릅뜬 눈으로 나무라는 엄마의 호통을 듣고서야 일어나니 엄마가 없어서, 엄마가 우리를 두고 어딘가로 영영 가버린 줄 알았다고, 그래서 눈물이 계속 나왔다고 목으로 넘어오는 서러움을 꾹꾹 삼키며 말했다. 그제야 엄마는 냇가에 빨래를 하러 갔다 왔다고 울지 말라고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마는 햇살에 이불 빨래를 널어 얼른 말려내려아침 일찍 빨래를 하러 갔었는데 나는 왜 엄마가 우리를 두고 어딘가로 가버렸다고 생각했을까? 그 시절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한참 일할 나이였고 출장이 잤았다.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던 엄마는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동생과 나를 데리고 몇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도청소재지로 몇 달째 출장 가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간 적도 있었다. 남편의 도움 없이 두 아이를 기르며 공무원 박봉으로 가난한 시댁 살림까지 도맡아 신경 써야 했던 엄마였다. 당신에게 놓인 책임이 녹록지 않았지만 엄마는 씩씩하게 헤쳐나갔다. 삼촌들의 학비를 제때 보내려 애썼고, 제사음식을 정성 들여 차려냈으며, 시댁의 크고 작은 일을 척척 해결하는 맏며느리의 책임을 다 했다. 그런 엄마는 언제나 심각해 보였고 어린 나는 엄마가 늘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화가 나 있어서 동생과 나의 작은 실수에도 심하게 꾸짖고 야단친다고. 실제로 엄마는 늘 엄격했고 그래서 무서웠다. 그 무서운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엄마를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엄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엄마의 흐느낌을 어떻게 토닥여주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엄마의 울음을 모른 채 했다. 그리고 왠지 모른 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엄마가 어서 흐느낌을 멈추고 다시 단단한 바위처럼 늘 씩씩하게 있어주기를 바라기만 했다. 무서운 엄마였지만 엄마가 없는 것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모두 나를 비난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와 공부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졸음과 피곤함을 달고 고등학생 큰 아이가 억지로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공부하는 상전이 따로 없다 싶어 치사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피곤한 아이한테 커피까지 내려 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평소에 큰 아이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려주는 커피를 오늘은 내가 직접 내려보려고 하다 그만 우당탕 소리가 나고 커피가루가 바닥에 쏟아졌다. 큰 아이는 자기 물건을 엄마가 왜 만지냐고 짜증을 내고 작은 아이는 엄마가 할 줄도 모르면서 커피를 만들려고 했냐고 거들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엄마가 이걸로 커피 내리려고 한 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고 쓸쓸하다 못해 배신감마저 들었다. 힘들게 키워 놓았더니 다 컸다고 나의 대단치도 않은 실수에 싫은 얼굴을 저렇게나 당당하게 보이는 게 괘씸했다. "엄마 오늘 회식 있으니까 아빠 오면 저녁 알아서들 먹어!"하고 출근했다. 나를 비난하는 아이들에게 밥을 지어 저녁을 해 먹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아서 없는 회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퇴근길에 비가 세차게 내린다. 하필 내가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 하늘에서 확성기로 "자, 모두 집에 들어갈 시간입니다"라고 외치듯 비가 쏟아진다. 모두들 우산을 받혀 들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집으로 가기가 싫다. 그렇다고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두고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SPA 브랜드에서 세일하는 지난 시즌 원피스를 하나 사고, 처음으로 네일 샵에서 손톱에 젤 네일을 했다.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쓰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지만 막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동네로 돌아오니 늦은 저녁이다. 해장국 집에 들어가 혼자 앉아 또 난생처음으로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집에서 혼술은 해도 밖에서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이다. 나이 사십이 넘어 처음 하는 게 많아서 나는 새삼스럽고 또 당혹스럽다.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애쓰고 있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허무함이 몰려올 때. 아이들도 내가 잘못 길러서 저렇나 싶고, 남편은 나를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존재인 것만 같고,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거추장스럽고 싫증 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고만 싶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너희는 엄마 없이 살아야 하는 가여운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니 그 운명에 맞서 굳세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라고 비장하게 말하고, 남편에게는 아무런 이별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직장에는 사직서를 내고 홀연히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일 뿐이다. 해보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던 엄마의 울음이 생각났다. 찬 소주가 목에 탁 걸린 듯 눈물이 날 것 같다. 내 아이들도 내가 어서 눈물을 멈추고 씩씩한 엄마로 돌아오기를 기다릴까 싶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홉 시가 조금 지났다. 이렇게 빨리 집으로 돌아온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려는 순간 큰 아이가 "제가 에스프레소 머신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쳐 드릴게요" 한다. 큰 아이의 말에 축축한 마음이 아주 조금은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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