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로션 휴지가 내게 오기까지
2009년이었다. 고3이었고 등교 시간이 일렀고 많은 친구가 지각했다. 지각비로 현금을 걷기가 애매했던 선생님은 교탁 위에 두고 쓸 크리넥스 휴지를 하나씩 가져오게 했다. 고3은 유난히 비염환자도 많아서 꽤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휴지가 모자라면 선생님이 직접 집에서 가져올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내에게 혼이 났다며, 자기가 집어온 휴지가 알고 보니 아내가 큰맘 먹고 산 비싼 로션 크리넥스였다 했다. 어쩐지 쓰는데 좋더라. 로션 휴지라는 게 처음 나왔던 시기여서 우리는 모두 웅성거렸다. 선생님 어쩐지 좋더라고요! 그치? 좋았음 됐어. 킬킬.
그리고 한두 주쯤 지났을까, 어느 주얼리 브랜드 사장 딸이라던 부잣집 친구가 벌칙으로 로션 크리넥스를 가져왔다. 선생님이 이건 지난번에 말한 비싼 것이니 평범한 크리넥스로 바꿔오라 했다. 그 친구는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에 이것밖에 없는데요. 덕분에 로션 크리넥스를 몇 장 더 써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두루마리 휴지를 식탁에 두고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뿐이라 했다. 그때까지 엄마는 크리넥스 휴지란 아껴 써야 할 비싼 물건이라 했기에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안 쓰면 대체 무엇을 쓰나 의아했다. 집에 와서 선생님의 말을 전한 후부터는 어쩐지 크리넥스 휴지를 좀 더 써도 혼나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양을 늘려가고 있었는데, 나는 존재도 몰랐던 로션 크리넥스를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고 쓰는 집이 있구나. 그렇다고 그 친구가 부자라며 유세를 부렸던 건 아니다. 졸업 후엔 미국의 어느 대학에 그림 그리는 과로 유학을 갔(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로션 휴지네 미용 휴지네 하는 것들이 비싸지 않게 팔렸다. 이제 우리 집도 부드러운 크리넥스를 숨풍 숨풍 쓴다. 나는 문득 그 친구 아버지의 주얼리 브랜드를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적자가 지난 분기와 같은 폭인 게 다행스러울 정도지만 주식이 떨어지기 전 대주주 일가는 주식을 대거 팔아 도덕성에 지탄을 받고 있다 했다. 어쨌거나 친구는 잘 지내겠지. 우리 집은 이제 테이블마다 크리넥스 휴지를 올려두고 쓴다. 그 친구는 어쩌면 이제 내가 모르는 네 겹 크리넥스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내 친구라 썼지만 나는 1년 동안 그 친구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 동창이란 말도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인 멀고 먼 사이다. 그냥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