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돌고 돌아 결국 너였다
하루 종일 삼색 볼펜을 몇 번이나 튕겨대며 색을 바꾼다. 검정을 주로 쓰고 싶지만 그러다간 검정만 나오지 않는 참사를 겪게 된다. 혼자 볼 메모는 억지로 파랑으로 쓴다. 쓰다 보면 이러다가 파랑만 나오지 않는 펜이 되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든다. 빨강은 이래저래 남겠지. 잔여 잉크가 눈에 보이게 설계해 주면 좋으련만 미감을 위해서인지 불투명하게 처리한 제작자가 사뭇 야속하다. 독서실처럼 고요한 사무실에서 볼펜 퉁기는 소리가 너무 크진 않은지 걱정도 한다. 정작 나는 다른 이의 볼펜 소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사무실에서도 취향을 드러내자는 마음으로 만년필을 들고 왔던 적이 있다. 회의 시간에 우오오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뿐, 회사에서 내가 쓰는 종이의 질을 결정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 잉크는 종이에 거미줄처럼 번지거나 종이를 스친 내 손에 쓸려 나오곤 했다. 이렇게 지저분해서야 프로페셔널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
어릴 적 자주 썼던 얇은 일제 펜을 써볼까도 했다. 하이테크니 사쿠라니 하는 그런 것들. 업무 노트를 들여다보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글자를 천천히 섬세하게 쓸 여유는 없다. 지워지는 펜을 사볼까도 했지만 잉크가 흐리다고 하고, 연필을 써봤는데 연필깎이로 깎는다 해도 깎는 행위가 번거로웠다.
사무실에서 왜 잉크펜이 아니라 볼펜만이 굴러다니는지, 의사는 왜 가운에 삼색 볼펜을 꽂고 뛰는지 이제는 안다. 무색무취의 지루한 물건이 아니라 필사의 생존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인 너. 그래도 개성을 포기할 순 없어 여느 캐릭터의 머리가 대롱 붙은 유치한 삼색 볼펜을 샀다. 펜대에 인쇄된 캐릭터가 손톱에 자꾸 긁힌다. 취향이 찢겨나가는 흔적인지 빨리 성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신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