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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Jan 10. 2024

용서란 무엇인가

정근섭의 <몽타주>

[ 사진 출처: 네이버 ]
법이 처벌할 수 없다면 기꺼이 내가
  

정근섭은 2000년대 초 개봉한 <달마야 놀자>, <공포택시>의 조연출 출신 감독이다. <몽타주>는 그의 첫 상업 영화로 각종 영화제 신인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주연 배우 엄정화가 50회 여우주연상(대종영화제)을 수상할 정도로 세간의 관심이 컸던 영화이다.


<몽타주>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복수극을 소재로 하였. 영화는 '서진의 실종, 봄의 실종, 하경의 복수극'으로 구성된다. 15년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교차하며, 연결 고리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흐른다. 아이를 납치한 범인이 종적을 감춘 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공소시효 종료 5일 전, 범인은 사건 현장에 꽃 한 송이를 놓고 사라진다. 그 후 15년 전 사건과 동일한 수법의 범죄가 일어나고, 미제 사건에 집착을 해오던 오 형사가 수사에 참여하면서 범인의 윤곽이 드러난다. 


<몽타주>는 자식을 잃은 엄마의 한과 복수를 긴장감 있게 그린다. 하경(엄정화)은 공소시효가 끝나버린 사건의 범인 한철(송영창)을 심판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는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감금한 방을 둘러보며, 그의 범행을 확신한다. 가슴속 움츠렸던 분노의 칼을 겨누려는 순간, 손녀(봄)의 정체를 알게 된다. 공소시효가 끝난 후, 범인의 행방을 뒤쫓던 형사들도 미제 사건에 손을 놓는다. 하경은 자신의 딸(서진)이 버려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한철의 손녀(봄)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다. 자식을 잃은 아픔을 그대로 돌려주고자, 한 편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용서란 무엇일까     


영화는 공소시효 15년이라는 법을 바탕으로 한다. 공소시효는 어떤 범죄 사건이 일정한 기간의 경과로 형벌권이 소멸하는 제도를 말한다. 2007년 12월 21일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연장됐고, 2015년 7월 24일에는 살인죄에 한해 공소시효를 폐지됐다. 이 제도의 취지는 ‘범죄 후 장기간의 시간경과에 따른 사실관계를 존중하여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고, 장기간의 도피생활로 인하여 처벌받는 것과 동일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범인에게 국가의 태만으로 인한 책임을 모두 돌리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하면 그동안의 도피 생활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인정하며 그 죄를 사면한다는 것이다. 현재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지만, 사형제도 부활, 촉법소년의 연령 하향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본 영화는 ‘용서’관련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기존에 동일 주제를 영화화 한 작품이 다수 있는데,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과 정병길 감독의 <내가 살인범이다>가 대표적이다. 영화 <밀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토대로 한 작품으로, 자식이 유괴 살해된 뒤 고통을 겪는 엄마와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 안식을 찾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하리라 마음먹고 그를 찾아간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며 안식의 미소를 띤다. <내가 살인범이다> 살아남은 피해자 가족의 아픔과 고통을 그린 작품이다. 가족과 형사가 힘을 합쳐 미해결 실종사건을 파헤치며 세상이 용서한 이두석을 심판하는 내용이다.


먼저 <몽타주>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사건 발생의 첫 출발점이다. 한철이 수술비(5천만 원)위해 서진을 납치했듯, 하경도 서진의 복수를 위해 봄이를 납치한다.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서진은 시신이 되어 돌아왔지만, 봄은 무사히 가족품에 돌아온다.  사건 모두 자식을 향한 과도한 애정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철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변론한다. 서진의 죽음은 자초한 일이며, 자신의 잘못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맞서는 그를 보며 분노를 일으킨다. 이렇듯 ‘용서와 화해’는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도리어 극약이 되기도 한다. 과연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악한 목적이 아니라고 해서, 그 죄책감이 줄어드는 걸까. 타인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은 그 행위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 용서란 피해자에게 주어진 아량으로, 진심으로 참회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암묵적 동의에 의해 이뤄져서도, 형벌을 낮추는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놈은 아직 자기 잘못을 모르고 있어요. 15년 전에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나요. 그게 맞는 일이잖아요. 내가 어떻게 악착같이 15년을 버텨왔는지 오 형사님 모르세요. 제발 오 형사님만 잠깐 눈감아 주시면 되는 일이에요. 제발 있을 때까지만, 그놈을 잡아 가둘 수 있을 때까지만, 제가 데리고 있을 수 있게 부탁할게요. 제발.. 제발..

                                                                                                                         - 하경의 대사 -



법의 관용,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나


영화 <몽타주>에서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 공소시효 종료 후 달라진 범인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사건 현장에 꽃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범인의 심리 상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승리의 축배인가, 용서의 보답인가. 현재 공소시효 폐지라는 제도 변화 이후에도 여전히 잔혹한 사건은 벌어지고 있다. 가장 슬픈 일은 뼈를 깎는 고통과 좌절을 견뎌온 유가족들이 온전히 위로받을 곳은 없다는 거다. 1%의 양심을 믿는 것이 법의 취지이지만, 법의 관용이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우리 사회의 법 체계는 가해자의 인권 보장에 치중된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는 자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인간의 이기심, 모성과 부성의 탈을 뒤집어쓴 인간의 잔혹성을 비판하고 싶다. 이러한 인간의 결핍을 메우고 원활한 사회 흐름을 위해 만들어진 법의 한계점을 더욱 지적하고 싶다. 사회의 문제들을 제도적 측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다. 과연 용서와 화해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답답하다. 법의 허술함을 이용해,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 반성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용과 선처가 필요한지.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법은 바뀌어야 한다. 법은 피해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구성되어야 한다. 법이 도시의 유령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해 존재했으면 좋겠다. 





정근섭의 <몽타주>는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폭력으로 노출된 아이들의 외침이 잦아지면서, 모성과 부성의 가치는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부모 사랑은 자식의 인격 성장을 촉진하는 거름이 된다. 반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독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지나친 자식 사랑이 타인의 권리 침해를 야기시키는 데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시사점 이외에도 탄탄한 시나리오, 긴장감 있는 연출, 모성의 끝을 보여주는 연기력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다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 구조는 국내 스릴러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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