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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Jan 03. 2024

달걀은 깨어나 바위를 넘는다

양우석의 <변호인>

                                                         [사진 출처: 네이버]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변호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상영 당시 정치적 색깔론을 내세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급기야 양우석 감독은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은 맞지만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나는 영화를 정치물의 하나로 보아야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예술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시대는 갔다. 관객들이 정치적 색깔론에 흔들리며 마음을 움직일 만큼 아둔하지 않다. 정치적 소재를 영화화한 것이라 해서, 그것을 정치 영화로 단정해 볼 수는 없다. 그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열정 그 자체에 주목해 보면 좋겠다.


영화는 1981년 전두환 정권 초기에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영장 없이 체포했던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우석(송강호)은 학벌도 백도 없는 변호사이다. 그는 변호사계에 아웃사이더로 활동하면서도 사업수완이 남다른 인물이다. 부동산 등기, 세금 전문 변호사라는 전문성을 살려, 부산 일대에 유명인사가 된다. 어느 날 단골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자, 우석은 대기업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그의 변호를 맡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영화는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매끄러운 시나리오에 빛을 더한 건 연기력이다. 먼저 감독은 부산 출신 배우들을 섭외해 지역적 특성을 잘 살렸다. 배우 송강호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법정신을 카리스마 넘치는 투혼으로 연기했다. 그의 특화된 생활 연기는 주인공 송우석 그 자체이다. 게다가 곽도원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선배들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차가웠다. 그는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일념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경감 역할을 잘 소화했다. 함께 출연한 고 김영애는 면회 신을 찍다가 실신할 뻔했다는 후담을 소개한 바 있다. 그녀는 힘든 연기이지만 최고의 배우들을 만났기에 가능했다며 후배들을 격려했다.


영화는 권력에 승복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장 기억 남는 장면은 법정신이다. 주인공 우석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대사를 울분과 함께 토해내는 장면이다. 우석의 울분은 독재와 탄압에 가려진 빛바랜 민주주의 역사, 그 트라우마를 들춰내어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준다. 


  얼마 전 한 고교 학교장이 <서울의 봄> 단체 관람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보수 단체로부터 고발당하는 일이 있었다. 교육감은 편향된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우려에 대해, 교원이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교권의 범주에 든다고 답했다. <변호인> 상영 당시에도 정치적 편향성을 우려한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영화 시장이 넓어진 것만큼 우리 국민들의 문화적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사실과 허구의 줄다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영화 자체를 너무 왜곡해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영화는 그리 거창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스토리와 인물들의 캐릭터가 다소 평범하며, 초호화 캐스팅을 빌미로 한 상업 영화도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한 인물의 의지. 젊음과 패기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연대하여 사회를 움직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달걀은 깨어나서 바위를 넘을 수 있다     


우석은 고등학교 동창생 윤택(이성민)이 “네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모꾼들을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며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일은 미련한 일이라며 항변한다. 절대 세상을 넘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 진리라는 우석에게 국밥집 아들 진우는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지만 바위는 죽어 있고 달걀은 살아 있다. 달걀은 깨어나서 바위를 넘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그 시절 방관해 왔던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 폭력과 협박이 난무하는 사회상을 대변한다. 동시에 멈춰있고 굳어있는 사회를 녹이고, 새로운 씨앗을 탄생시키 위한 연대의 힘을 강조한다.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떠밀려. 부조리에 눈감기도 한다. 악습의 고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부조리한 세상을 방치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래된 악습을 고수하는 사회는 시대에 뒤처져 낙후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서도 약자의 권리가 유일하게 지켜져야  곳이 있다. 바로 법정이다. 주인 된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법정이고, 이러한 법은 나이, 성별, 인종, 학벌의 높낮이로 구분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물을 수 있으며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깨어있어야만 한다. 세월에 순응하고, 부에 수동적이며, 직위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깨어 있음'은 무엇인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진우는 국밥집에서 어머니의 일을 돕는 학생으로, 척박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앎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인물이다.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독서토론회를 이끌며,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는 열등감을 돈으로 메워가는 우석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힌다. 죽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살아있는 우리들의 열정'이라는 사실을.


노마디즘,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주인공 우석은 들뢰즈가 말하는 노마디즘(Nomadism), 즉 유목민적인 삶을 실천한 인물이다. 변호사의 터전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개척하려는 시도를 거듭한다. 전공, 체면, 나이 등을 불문하고, 모든 일에 용기를 가지고 도전한다. 그는 건설회사 노동자로 지내다 사법시험에 통과해 판사가 되었고, 다시 변호사로 개업하여 부동산 등기, 세금전문변호사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그 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여 민주주의에 한몫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노마디즘은 철학자인 들뢰즈와 정신분석학자인 가타리가 공통 집필한 <천 개의 고원>에서 제시한 철학적 용어이다. 마디즘은 생성의 땅으로 나아가는 시도이며,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힘을 말한다. 유목민적 삶이란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가는 활동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석은 개척자로서의 삶을 산 인물이 분명하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남다른 눈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타인이 개척하지 못한 불모의 기지를 자기 신념으로 일궈내며 몸소 증명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 힘으로 작용했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국민들의 인권 운동에 희생해 왔다. 만델라로부터, 간디, 전태일까지 일련의 모든 운동은 인간다움의 운동이다. 수많은 국민들의 바람을 모으고, 가난한 자의 슬픔을 위로한 그들의 노력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의지에서 출발하였다. 깨지지 않는 바윗돌을 향해 끊임없이 부딪치는 열정과  의지로 일궈낸 일들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에 또 다른 의지가 모여 풍선효과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움직이지 않았던 바위도 서서히 동요하였다. 나도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싶다. 인구 절벽, 경제 위기라는 살얼음을 밟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희망의 봄바람이 불기를. 열정의 불씨를 살릴 거인들이 하나 둘 나타나주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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