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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Dec 11. 2023

슬픈 자아에게 날개를 달아주자

(삼원스케치북, 스텐들러 피그먼트 라인펜)

어깨춤에 매달려 아우성이다. 한가득 구겨 넣은 탓인지,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벌써부터 말썽이다. 자리다툼하듯 소란스러운 그 존재는 엄마의 사랑으로 빚어낸 소풍 가방. 그날 그것이 내 인생 첫주인공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8살 소풍길에 트럭과 부딪히는 불운을 겪었다. 쓰러진 나를 부둥켜안은 건 트럭기사였다. 택시에 담긴 채 한참을 갔을까. 흐느끼듯 오열하는 그의 음성이 죽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차갑고 시린 다리. 무릎뼈가 훤히 보이는 다리 아래로 대롱대롱 매달린 엄지발가락. 가장 고통스러운 건 피와 살점으로 뒤범벅된 나의 다리가 아니라, 지옥도가 되어버린 병원이었다. 당시 대학병원 응급실은 지옥 그 자체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늦은 시간까지 수술받지 못한 환자들로 북적였다. 그날 밤 교통지도하듯 외치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고, 나는 무사히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뒤로 또 한 번의 사고가 있었고, 다른 이유로 2번의 전신마취수술을 받았다. 청소년기 적지 않은 번뇌로 힘들었을 즈음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슬픈 자아는 고독한 대상에 빠지는 법일까. 나의 아픔을 무디게 만들어 줄, 지독하게 외롭고 처절하게 슬픈 주인공을 찾아 헤맸다. 나는 그렇게 정화된 감정을 부둥켜안고 아슬아슬 버텨왔고,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읽고 쓰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중독자가 되었다.  


(삼원스케치북, 스텐들러 피그먼트 라인펜)

어반스케치는 말 그대로 도시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종이에 담는 게 핵심이다. 풍경과 인물을 흑백으로 표현하는 만큼, 빛과 그림자는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펜 하나로 생동감을 연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오히려 비전공자라는 입지가 더 나을 때가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무모한 일에 도전할 수 있으니.

  라인펜을 처음 접한 날, 나는 낯선 골목길을 그렸다. 흑백의 조화가 제법 자리를 갖춘 듯 보였다. 두 번째 그림을 그리면서, 문뜩 내 그림에도 주인공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마음 가는 대로 색을 넣었고, 어느새 주인공이 생겼다. 다만 삼원색을 그대로 사용하면, 조화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앎은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걸까. 현재 조합에 신경 쓰면서, 나만의 빛깔을 는 중이다.


나는 책이나 영화를 소통의 매개로 쓴다. 청소년의 경우라면 고전이나 단편 소설이 다.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인물을 탐구하는 데 효과적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과 학습에 도움이 된다. 학생들은 인물에 대한 공감, 비판, 전망 등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할 수 있다. 독서 감상문의 경우,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등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것이니, 그다지 어려울 게 없다.

  다만 시, 소설, 수필, 극문학의 경우라면 어떨까. 얼마 전 글감 찾기 수업을 진행했는데, 학생들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학생이 "전 좀 평범하게 살아요. 다른 친구처럼 여행도 자주 가지도 않고요"라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수필의 첫출발은 평범한 일상 속에 숨은 재료를 찾는 데 있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기록하는 글이 아니다. 일상적 소재를 특별한 대상으로 바꿔 놓는 데 매력이 있으니, 외면했던 나의 일부분도 소재가 될 수 있다. 나는 친구와 다툰 일, 숙제를 하지 못해 엄마에게 혼난 일,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나만의 결핍,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의 과거 등 부정하고 싶은 나의 기억을 소환해 보길 권했다. 행복은 불행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니, 내면의 그림자에 집중하다 보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복과 불행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행복한 자아도, 슬픈 자아도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슬픈 자아에게 날개를 달아주자


소풍 가방은 내 삶의 첫 주인공이 되었다.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며 미워했던 그 가방은 충격 보호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스팔트 바닥에 어린 소녀의 머리가 닿을까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했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울퉁불퉁 못 생긴 소풍 가방은 더 이상 불행의 상징물이 아니다. 내 인생 영원한 주인공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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