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취미 판단에 근거한다. 미에 대한 수용방식을 보면 객관적인 규정보다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평가된다.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도덕이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자유로운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사회에서 보편적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자율적인 방식으로 쾌와 불쾌를 판단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도덕과 예술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가있다고 보았다. 미적 공동체, 즉 공통감에 의해 유희가 일어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로 보편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거다. 미적 대상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경우인데, 대체로 명작과 조우할 때 발생하는 쾌감이다. 이는 인류의보편적관점을 토대로,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가 예술미를 이룰 때 조성된다.
[ 파브리아노 워터칼라 스케치북, 신한 수채 물감 ]
선인장은 여기저기 혹이 난 형상을조화롭게 채색하는 게핵심이다.그래서인지 초록과 보라가 어우러진선인장을보자걱정이 앞섰다. 갖가지 배색을조합하는 과제가초보자의 눈엔쉽지않아보였다. 곁눈질로 선배들의 그림을 훔쳐보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며 과감하게 붓질을 하고 두 가지 색을 정밀히섞었다. 찍고 펼치기를 거듭하다완성된 그림을 들여다보니 꽤나괜찮은듯 보였다. 그러나멀찍이두고 보니조화롭지 않은선인장의 형상에아쉬움이 남는다.
과일 그리기 첫 과제로 복숭아를 받았다. 이번에는 멀리 그림을 견주어 보며 전체 비율을살폈다. 구도나 비율을 체크하면서 색의 조합에 집중했지만작은실수가 완성미를 떨어뜨렸다. 선생님은 복숭아 사이의 경계를 잘 살펴보라는 말을 건네며, 작은 선 하나가 전체 조화를 무너뜨릴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다.결국 어디서 봐도 균형미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를 위해 어울림을 중시하면서도 세밀한 작업을놓쳐서는안 된다.
글쓰기도 조화가 중요하다. 10여 년 전 나는 시나리오 작가반에서 3년간 공부한 적이 있다. 모 교수는 도입이 모든 글을 결정짓는다며 첫 장에 큰 공을 들이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공모전에 제출된 원고의 대부분은 첫 장으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 나머지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촘촘하게 의도와 주제에 따라 설계돼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합평의 과정을 끊임없이 진행했고, 나는 각종 독평을 견뎌내야 했다. 그때 생각의 나열로 두서없이 쓴 글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것.보편적 가치를담아균형미를이루는 것이 완성도를높이는 필수 조건이라는 걸깨달았다.
학생들을 지도할 경우 우선적으로 생각할 점은 필체다.내용과 형식의 배합이 관건이지만,그보다필체의중요성을 지도해야 한다. 손글씨는 그 자체로도 감정과 의도를 담을 수 있고, 첫 이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학생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글씨체인데,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쓴다. 워드 작성에 익숙해진 세대이니만큼 그저 생각 남기는 데 급급할 뿐이다.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기에나는 글쓰기를 대하는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글은 마음의 거울이니, 마음을 표현하는 데 정성을 다하자며.
조화가 아름다움을 낳는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 요리만큼이나 플레이팅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그릇이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사실이다. 글도 마찬가지다.어떤 내용을 담느냐, 어떤 방식으로 담느냐가 작품의 질을 결정짓는다. 색다른 내용을 담더라도 문체, 구성, 관점 등에 따라 전달력이 달라지니, 고뇌와 노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그래서일까.나는쓰면 쓸수록어려운 게 바로 글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