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의 일이다. 영상 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교양 수업을 맡은 적 있다. 학생들은 시나리오 제작부터 촬영, 편집, 시사회 등 일련의 과정에 참여했고, 학과, 학년과 관계없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중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는데, 영화과에 재학 중인 A였다. 출석은 물론이요시나리오, 영상제작까지,완성도높은 결과를제출해 기대가 큰 학생이었다.
기말고사 기간, 나는 시나리오창작 방법을 적용해 씬을제작하는 문제를 출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학생들의시험지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짐을 싸는 A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A는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어딘가 불편한듯보였는데,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시험지를 놓고 나갔다.나는 시험지를 살펴보던 내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낙서하듯 흘러내린필체 아래로 간절함을 호소하는문장이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 파브리아노 워터칼라 스케치북, 신한 수채 물감 ]
모방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먼저 창작물 그 자체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면 안 된다. 가령 상대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결과물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 체득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나의 방식과 상대의 기술을 견주어 보는 행위 그 자체에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창작물에 대한 남다른 해석, 작가만의 관점이 스며들어야 한다.
피카소는 현대 미술의거장중한 명으로명언을 많이남겼다. 그는 '남의 것을 복제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성공한 사람을 따라 하다 보면 성공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모방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라고말하며 자기 복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는단순히 남의 것은 되고 내 것은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발전에 게으른 자신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나는현재 평론집 출판을 진행 중인데, 수년의 자료를 모아 응급처치를 끝낸 상태다. 마지막 퇴고를 앞두고 있는데, 어쩐지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도, 해석하는 방식도 너무 한결 같은 게 아닌지 반성해 본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지인들은 한 마디씩 거든다. "못난 자식도 네 자식이다", "첫 출판은 다음 출판을 이루는 과정이다" 모든 글은 퇴고의 과정을 거치지만,마냥 한 작품에 머물 순 없다는뜻이다. 그럼에도퇴고에 혼신을다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잊지않고 있다.
글쓰기 지도에도 나만의 철학이 있다. 아이들이 모아 둔 글을 학교에 제출할 때면, 되도록 전에 썼던 글을 가져가지 말라고 한다. 새 책을 읽고 다시 쓰라는 지도를 하되, 다급한 경우는 베낄 게 아니라 수정하라고 말한다. 과한 점은 버리고 부족한 점은 채워보라는 것. 그것은 퇴고를 통해 한 단계 발전된 글을 써보라는 의미다.
우려먹다 체한다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 어떤 일이든 급하게 서두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일을 낳는다.창조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압박감, 약속한 일에 대한 책임감에 떠밀려 잘못된 판단을 할 경우가 더러 있다. 자신의 한계가 드러날까 봐잘하는 것에매달리거나, 타인의 결과물을 넘보는실수를범한다. 그럼에도반성하는사람에게기회가있다.자신을되돌아보고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만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