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00였다면 시나리오 몇 편을 더 썼을텐데.." 공중파 드라마로 이름을 알린 그가 예비 작가 시절 내게 한 말이다. 당시 선배는 입봉작가로아카데미내에영향력 있는사람이었다. 국내외 안 본 드라마가 없을 정도로성실했던 그는재능뿐아니라열정까지도 남달랐다.
선배는한때나의 창작환경을부러워했다. 스릴러 영화가 폭풍적인 인기를 끌던 당시나는경찰 지인들과 연이 닿았다.일반인이라면 범죄 현장을 경험하기 어렵고 인터뷰조차 쉽지 않으니, 나는 참인복이많은 사람이었다.그러나선배의 그 말에는충고와 격려가내포되어있었다.좋은 재료를 눈앞에두고도 쓰지 못하는 사람. 간접 경험도 자산이라했거늘 부족한날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 파브리아노 워터칼라 스케치북, 신한 수채 물감 ]
경험이 참 무섭다. 나에게수채화는어렵지만익숙한장르다.유년 시절 꽃과 나비, 자연물의 이미지가 나의 일상을가득 메웠는데,주로실물이 아닌 예술이 많았다. 어머니는 수많은 자연물을 자수로 남기셨고, 나는 어여쁜 꽃들이 액자나 병풍으로 변해가는 걸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모란이나 목련은 익숙한 존재였고,그들에게색을 입히는 과정은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대상이든 자주 만나면 익숙해지고 정이 드는법. 대상의 형태나 특징을 파악하는 일이수월해지는 건이때문일까. 반대로 현재의 낯섦은 미래의 익숙함을 위한과정으로, 수많은 감정들을 경험하면서적응할방식을 찾는다. 이러한 과정은 삶의 지혜를 축적하는 훈련과도 같다. 이에실패까지도미래의 자산으로 남겨둘 수 있으니 도전에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경험은창조의원동력이다.간호사친구가'의사들의사랑'을 소재로한 작품을 써 작가로 등단했다.그녀는의료계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작품에 사실성과 개연성을 높여제작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굿 파트너>도 이혼변호사의 경험을 녹여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두 사람모두 자신의 경험을창작의기회로삼은 데 공통점이 있다.
학생의 경우라면 어떨까. 인생 경험이 부족하다면영화나 드라마, 도서, 인터뷰 등의 간접경험이좋다.다양한 문화를 접해글의소재로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독서는어휘력향상뿐 아니라 글감이나주제찾기에좋은 재료임에틀림없다. 얼마 전 학생들과 함께 이태준의 <까마귀>로 글을 썼는데, 먼저심미적 표현들을두루살피는 데 집중했다. 그다음 유미주의 작품들을 하나 둘 소환했는데, 학생들은 김동인의 <광화사>와 <광염소나타>를 이미 정독한 상태였다.이에 소설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찾은 뒤 작가의 가치관과 '나'의 생각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는 팁을 제시했다. 학생들에게 다소 어려운 과제일 수 있지만, 독서 경험이 많은 아이들이라문제 될 게 없었다.
경험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경험치는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시대, 나이, 성별, 성격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기억하기 때문에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경험이 더 오래 남는다. 다만 감정을 넘어 통찰의 기회로삼기 위해서는 자신의경험을 곡 씹어 봐야 한다.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이 모든것이 한조각으로맞춰지면비로소창조의 힘을 얻게 된다.일상의 작은 일들이 하나의 형식으로 융합될 때 예술로 완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