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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변호사 May 27. 2019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

모든 수험생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나의 간절한 바람

나에게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으라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입 재수를 했던 2007년과 로 3 시절을 보냈던 2016년을 꼽을 것이다.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매일이 치열했고, 누군가 20대로 다시 돌아가게 해 준다면 매 순간 나는 다시는 그렇게 열심히 살 자신이 없을 정도로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았다.


학부 재학 중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중앙도서관으로 향했고, 그렇게 하루 종일 공부를 하다가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할 시간 즈음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시험기간에는 새벽에 버스 첫차를 타고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갔고, 그렇게 버스 안에서 물놀이하듯 헤드뱅잉을 하는 내가 불쌍해 보이셨는지, "학생 그렇게 졸리면 좀 자"라고 말씀해주신 아저씨의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던 나조차도 나 스스로 "와 이건 내 인생에 두 번은 못 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입 재수생 시절 그리고 로스쿨 3학년 시절이었던 것이다.



굳이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로스쿨 3학년 때를 꼽고 싶다. 왜냐하면, 대입은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더라도 다른 학교를 갈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자유'를 맛보지 못했을 때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불안함이란 고작 대학의 이름이 바뀌겠구나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하지만 로스쿨 3학년 때에 겪은 불안감은 감히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로스쿨 3학년을 시작한 후 처음 본 6월 모의고사에서 형편없이 낮은 등수를 받아야 했고, 이대로라면 무조건 불합격이라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2학년 2학기부터는 효율적인 공부고 뭐고 일단 숨 쉬는 시간은 공부만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기 시작했더니, 드디어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목이 굳어져서 움직이지 않기 시작하고, 그다음은 허리가, 그다음은 골반까지 극심할 허리디스크 증세가 찾아왔다.



앉는 것도, 서는 것도, 걷는 것도 심지어 눕는 것도 힘들었고,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신경을 누르는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시험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척추에 주사를 맞고 많은 양의 진통제를 먹으며 고통을 참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화해야 할 공부의 양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나는 공부가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우선 식사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지하 매점에서 김밥을 사서 3층 열람실까지 걸어 올라가며 먹는다기보다 밀어 넣는다는 것에 가깝게 위장으로 음식을 밀어 넣고 바로 자리에 앉아 다시 공부를 했다.



모든 SNS를 끊고, 너무나 처절하게 외로웠지만 모든 지인들과 연락을 끊었다. 누군가와의 트러블로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고, 주위를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으로 다가와 매일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그렇게 땅만 바라보며 걸어 다녔다.



그 와중에도 나는 거주비에 지출되는 비용을 아끼고 싶어서 3년 동안 통학을 했고, 허리디스크로 신경이 눌려 도저히 걷기 힘든 상황에도 그 무거운 책을 잔뜩 백팩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서 대중교통으로 통학을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이기에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더욱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었다.



6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변호사시험이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합격이 불가능할 것 같은 성적을 받아 들었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그 순간 좌절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정확히 이 표현이 맞다. 나에게는 "아 이게 뭐지? 왜 이러지? 어머 내 성적이 왜 이럴까?"를 떠올릴 여유조차 없이 그건 그거고 나는 '**마이웨이'하겠다. 라며 앞으로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좀 더 속도를 가했고, 밥 먹는 시간을 좀 더 줄였고, 답안지를 좀 더 많이 썼고, 하루 종일 답안지 쓰는 연습을 너무 많이 했더니 팔에 아무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잠자는 시간을 좀 더 줄였고, 이제는 집에 오가면서 지하철 안에서 뿐만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봤다.



주위에 누구라도 붙들고 "아 나 힘들어. 나 못 하겠다."라고 말할 여유조차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 번 시험에 반드시 한 번에 붙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내 몸도 체력도 1년 더 나를 허용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죽을힘을 다 해 시험이 끝나는 그 순간 까지만 밀어붙이자. 그리고 정말 후회 없이 딱 그만두자. 나에게는 이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나는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수험생활을 접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고.



오로지 그 생각으로 버텼다. 정말이지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되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 끝까지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마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다" 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어찌 보면 이 시기가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나 스스로에게 가장 가혹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가끔 시험을 준비하면서 힘들어하는 분들의 연락이 온다. 그분들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알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그저 흘려보낼 하소연으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내가 처절하게 외롭고 힘들어봤기에 나에게 그렇게 힘들다고 말해주는 이들에게 나는 진심을 담아 부탁한다. "부디 끝까지만 버텨보자고."

내 주위에 분명 힘들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포기할까 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고, 나만 포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조금은 더 힘을 내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힘든 수험생활을 보내고 있는 모든 분들이, 아니 꼭 수험생이 아니더라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모든 분들이 지금 내가 힘든 이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리고 분명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살아남는다'라고 믿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버티는 놈은 이긴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쉬우면 세상에 다 성공만 하겠네? 라며. 하지만 나는 그 '버티는'게 얼마나 힘든 건지를 깨달았다.


그러기에 오늘도 그 힘든 삶을 버텨내고 있을 모든 수험생들과 모든 직장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지금 버텨내고 있는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박수 쳐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너무 힘들 때에는 하루씩만 살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것을 끝내면,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을 걷다 보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너무 힘이 들 때는 먼 미래를, 거창한 목표를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 목표에 도달해 있을 거예요.


부디 힘든 오늘을 견뎌내고 계시는 모든 수험생 분들이 조금 마나 더 버텨내시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너무나 잘해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온 마음 담아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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