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험생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나의 간절한 바람
사람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면 뇌가 그 시간을 압축해서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내 기억 속 재수생시절과 로스쿨 3학년 시기는 어렴풋한 순간으로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빠짐없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 자신이 없다."라고 답했을 만큼, 나의 20대는 한순간도 빠짐 없이 매일이 치열했다. 대학생 시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중앙도서관으로 향했고, 하루 종일 공부를 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으니 가끔은 중앙도서관이 내 집이자 내 방 같았다. 시험기간에는 새벽에 버스 첫차를 타고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갔고, 버스 안에서 사물놀이하듯 헤드뱅잉을 하며 졸다가 PPT 출력물을 와르륵 바닥에 쏟아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자 그런 내가 불쌍해 보이셨는지, "학생 그렇게 졸리면 좀 자"라고 말해주시던 옆 자리 아저씨의 측은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는 나조차도 "와 이건 내 인생에 두 번은 못 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입 재수생 시절 그리고 로스쿨 3학년 시절이었다.
얄밉게도 굳이 둘 중 꼭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로스쿨 3학년 시절이다. 재수생 시절은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더라도 다른 학교를 갈 수는 있었다. 그리고 아직 세상의 자유를 맛보지 못했을 때였으니 이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 많은지 미처 알기 전이었지. 그리고 나에게 있던 불안함이란 고작 내가 갈 대학교의 이름이 바뀌겠구나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로스쿨 3학년 때에 겪은 불안감은 “생존의 위기”였다. 로스쿨 3학년을 시작한 후 처음 본 6월 변호사시험 모의고사. 첫 모의고사라고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있을 변호사시험까지 약 반 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6월 성적이 변호사시험 성적이라는 속설이 있을정도로 남은 기간 동안 성적을 드라마틱하게 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공부량이 많고 시간이 부족하고를 떠나서, 상대평가인 이 시험에서 나만 죽어라 공부를 하는 건 아니니까. 공부라면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니. 나만 죽어라 하나. 쟤도 죽어라 한다. 목숨 걸고 해도 현상유지나 하면 다행인 상황이다.
그렇게 본 첫 모의고사 성적발표 날.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모의고사 응시생 110명 중 97등. 망했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 ㅈ.. (정신차려. 이건 책이야.) 아..끝났구나." 이건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내가 다니던 로스쿨의 전년도 합격률을 고려하더라도 변호사시험까지 남은 6개월동안 등수를 30등 가까이 올려야 합격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들이밀까 말까 였다. 하지만 시험을 6개월 남기고 30등을 올려야 한다는 건 마치 축구 경기 후반 연장전 5분을 남기고 2:0으로 지고 있는 상황 같았다. 누군가는 이미 끝났다며 티비 채널을 돌려버리고 아주 드물게 누군가는 그래도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일말의 기대조차 없이 지켜보고 있을 그런 상황.
이미 로스쿨 3학년에 올라오기 전 겨울부터 효율적인 공부 방법이고 뭐고 일단 살아 숨 쉬는 시간에는 공부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이렇게 해도 눈앞에 97등이라는 결과가 주어지자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연장전 종료 7분전이지 않은가. 코너킥 기회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해도 좌절할 시간도 없다. 정말 이 표현이 딱이었지. 나에게는 좌절할 시간도 없었다. 성적표를 받아들고 '끝난 게임이구나'라는 생각에 뒤이어 나다운 악바리 기질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야, 그래서 안 할거야?"
나에게는 아직 6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남아있었고, 이미 2년이 넘는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이 부었는데 여기에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끝난 것이나 다름 없을 수 있지만 아예 끝난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런 고민할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보자. 나에게 선택지는 없다. 그날부터 글자 그대로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걷는 시간만 빼고는 (화장실에서도) 판례를 외우고, 각종 법률 요건을 외우고 공부를 했다. (길을 걸을 때조차도 요약집을 들고다니며 공부하긴 했지만 차에 치일뻔한 후로 책은 걷다가 멈추었을 때만 보았다. (그래도 시험은 보고 가야지 하늘나라)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러면 음식이 아니라 글자를 씹는 맛이 나서 음식을 씹는 순간만큼은 잠시 휴식하기로 했다. 대신에 밥을 마시듯이 먹었고 그때의 습관이 남아서 지금도 어딜가든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밥을 빨리 먹는다. 회사에서도 소개팅에서도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버린다는 점. “밥을 마..신거에요?” “네. 제가 습관이 좀.”
그렇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할지 라고 고민할 시간조차 없이 하루 중 모든 시간을 공부로 채웠다. 어쩌면 이렇게만 하면 이 게임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도 생겼다. 하지만 삶이 나를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가만히 둘 리가 없지. 로스쿨 3학년 중반이 지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공부를 하고 있는데 조금 뻐근하다 싶던 목이 점점 굳어지더니 목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는 척추에 전기침을 놓는 것 같은 찌릿한 통증이 점점 커지더니 통증은 꼬리뼈로 골반을 타고 내려가 그 다음은 오른쪽 뒷다리까지 통증이 이어졌다. 허리디스크였다.
앉는 것도, 서는 것도, 걷는 것도 심지어 눕는 것도 힘들었고,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신경을 누르는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벽을 잡고 숨을 몇 차례나 내쉬며 한참 걸려 일어나야 했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절뚝거리며 통증이 덜한 자세를 찾아보았지만 벽을 잡고 평소보다 몇 배는 느린 걸음으로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잠을 자려고 누울때에는 밤이 오는 게 두려울만큼 통증이 심했고 속도는 느렸다. 누워서 재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재채기하다 뒈진 사람도 있겠구나’ 머리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식은땀이 한 순간에 주욱 나버릴만큼 억 소리도 나오다 들어갈 만큼 심한 통증이 이어졌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1분 1초라도 아끼려면 뛰어다니면서 공부만 해도 부족할 이 시간에 이게 무슨 일이지. 온 세상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공부 좀 하겠다는데 이렇게 나를 가로막을 건 또 뭔가. 그런데 역시나 원망하고 낙담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래서 뭐, 안 할 거 아니잖아?
시간은 내가 얼마나 아프거나 말거나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속절없이 흘러갔다. 급한 마음에 정형외과에 찾아가 너무 아프다고 로스쿨 3학년이고 시험을 3시간 넘게 앉아서 봐야 하는데 다 괜찮으니 앉아서 시험 볼 동안만이라도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처음보는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고 척추에 주사를 맞으면서 많은 양의 진통제를 먹고서 고통을 참은 채로 시험에 임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도 앉아있으면 통증이 지속되어서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맨 뒷자리에 앉아 시험 중간에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간신히 시험을 마쳤다. 이렇게 누가 보더라도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공부만 하고 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화해야 할 공부의 양은 너무나 많았다. 어느모로 보더라도 내가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 선택한 방법은, 식사시간 줄이기.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지하 매점에서 김밥을 사서 3층 열람실까지 걸어 올라가며 먹는다기보다 위장으로 음식을 밀어 넣고는 그대로 열람실로 들어가 바로 자리에 앉아 다시 공부를 했다.
모든 SNS와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처절하게 외로웠지만 누군가와의 트러블로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고, 길에서 주위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으로 다가와 매일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그렇게 땅만 바라보며 걸어 다녔다. 외롭다 힘들다는 생각이 올라와도 그 감정에 취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학자금 대출만으로도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여기에 월세까지 추가할 수는 없다며 3년 동안 길음동에서 이대역까지 통학을 했고, 허리디스크로 신경이 눌려 도저히 걷기 힘든 상황에도 그 무거운 책을 잔뜩 백팩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서 대중교통으로 학교와 집을 오갔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이기에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더욱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내 선택이었고, 내가 책임져야만 했다.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조차 사치처럼 느껴졌고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것. 나는 지금 내 발보다 한 발 앞. 딱 거기 까지만 보기로 했다. 한 발자국만 내딛자. 한 발. 그 다음 한 발. 이렇게 해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도달하지 못하면 어쩌지 따위의 생각이 떠오를 때면 지금은 네가 올라올 때가 아니라며 올라오는 불안을 깊숙이 눌렀다.
변호사시험에 한 번만에 붙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집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내 몸도 마음도 1년 더 수험생활을 허용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죽을힘을 다 해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그리고 정말 후회 없이 딱 그만두자. 나에게는 이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나는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수험생활을 접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고.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고, 내가 되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 끝까지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마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다" 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그리고 정말 마법처럼 그렇게 한 발 앞만 보면서 한발자국씩 내딛다 보니 어느새 경기는 끝나 있었다. 버텼구나. 이게 또 이렇게 끝나지는구나.
가끔 시험을 준비하면서 힘들어하는 수험생들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알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그저 흘려보낼 하소연으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내가 처절하게 외롭고 힘들어봤기에, 그렇게 힘들다고 말해주는 이들에게 나는 진심을 담아 부탁한다. "부디 끝까지 버텨보자고." 살다보면 주위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힘들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가 힘들고, 누구나 포기할까 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 나만 힘든 것도, 나만 포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묘하게 조금 더 버텨낼 힘이 차오른다. 그러니 견디기 힘들 때면 그게 수험생활이든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든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결코 내가 부족해서 힘든 상황을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텨내고 있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넘치게 대단하다고.
너무 힘들 때 나는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오늘 하루 주어진 것을 끝내면,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을 걷다 보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너무 힘이 들 때는 먼 미래를, 거창한 목표를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이 순간에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 목표에 도달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시험 합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끝까지 버텨냈고 스스로에게 떳떳할 만큼 치열하게 살아보았다는 것. 다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내 딛어 보았다는 것. 결국 나는 완주를 해냈구나 라는 경험이 몸에 쌓이도록 나만의 최선을 해보는 실감은 결국 내 안에 쌓여 또 힘든 상황을 맞았을 때 다시 한발을 내딛을 수 있는 근육을 만들어 준다. 힘이 들 때에는 주위에서 해주는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친구가 가족이 건네는 응원에 “고마워. 덕분에 힘이 된다.”라고 답해보지만 사실 힘내라는 말로는 힘이 나지 않는다. 도무지 어디에서 에너지를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해 막연하게 답답할 때 그때 내 안에 저 깊이 숨어있던 한 발 더 내딛었던 실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나가게 해주는 근육이 되어준다.
결국 나를 믿어줄 수 있는 것도, 한 발자국만 더 내딛어 보자고 손 붙잡고 이끌어 내는 것도 다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힘든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잘 버텨내고 있는 스스로를 잠시나마 따뜻하게 바라보았으면, 그리고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다음 발자국을 내딛고 그렇게 조금씩 다만 멈추지 말고 걸어갈 수 있기를, 부디 나만 홀로 힘든 것 같다는 외로움에 지쳐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