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평가하는 세상
"그게 전부가 아니야."
로스쿨을 준비하던 어느 날, “4.0, 975, 111!!” 세 개의 숫자를 외치면서 경기를 하며 잠에서 깼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로스쿨 입학을 준비해 본 사람이라면 많이 들어보았을 단어. “학토릿” 학토릿? 햄토리? 캐릭터 이름 같은 이 귀여운 단어는 잔인하게도 "학점, 토익, 리트점수"의 줄임말이다. 로스쿨 입시를 결정짓는 중요한 점수 세 가지이다. 나는 한 때, 저 세 개의 숫자로 평가받는 세상에 속해 있었다.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누구입니다."와 같은 정도로 자기소개의 첫마디이자 상대에게 건네는 첫 질문이 바로 이 세 가지 숫자다. "학토릿” 치열한 입시 준비 과정에서 4년 동안 피, 땀, 눈물을 갈아 넣어 만든 학점과, 이 정도면 ETS의 책상 의자 하나는 나의 것이 아닌가, 이 정도면 토익은 나라에서 지원해줘야 하는 국가고시가 아닌가 싶을 만큼 반복해서 시험을 보며 얻어낸 토익점수, 어차피 공부를 한다고 하여 점수가 오르는 성격의 시험이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비싼 돈을 들여 인강을 듣고 (이 노력이 무용함을 알면서도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는 계륵 같은) 공부를 하여 본 리트성적. 로스쿨 입시를 준비할 때, 이 세 가지 숫자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좀처럼 악몽 따위 꾸지 않고 시험 전날도 마취총에 맞은 것처럼 숙면을 취하는 나조차 한참 잠을 자다가 "4.0, 975, 111"을 외치며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입시의 세계에서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는 모두 이 세 개의 숫자로만 말할 수 있었다. 마치 숫자의 언어로 번역을 한 것과 같이. 입시 원서를 쓰는 순간이 되자 다시 한번 숫자들이 등장했다. 마치 대학입시 때 그랬듯이, 각 로스쿨별로 전국 순위 등수가 매겨졌고, 소위 말하는 "SKY" "중경외시" "서성한이" "서울 대형" "인서울" 각 학교들을 서열화하여 부르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부끄럽지만 나도 이런 서열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았으니, 학토릿 숫자를 소리 지르며 잠에서 깰 만큼 나의 모든 인생이 세 개의 숫자로 결정되는 것 같았고, 나는 이 세 개의 숫자를 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 개의 숫자를 조합하면 사실상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로스쿨이 결정되었고, 그 로스쿨을 졸업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느 위치까지 갈 수 있는지 마치 나의 모든 미래가 결정된 것 같았으니까. 결국 나조차도 이런 줄 세우기, 등수 매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서열화와 줄 세우기에 동참한 자들이 겪는 모순이 있다. 그 서열과 줄 세우기에서 내가 누군가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면 잠시나마 안도하고 만족감을 얻을 테지만, 동시에 나도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뒤처진다면 그만큼 불안함과 낙오자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는 것. 그렇게 세 개의 숫자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렸고, 한밤 중에 숫자를 외치며 잠에서 깨어나는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던 세 개의 숫자는 일을 시작하고 8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쓰려고 굳이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간신히 떠올렸을 뿐 삶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가 되었다. 원하는 로스쿨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변호사가 되었고, 꼭 한 번 즈음 일해보고 싶던 곳들을 옮겨 다니며 변호사가 된 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차곡차곡 해내고 있다. 이 세 개의 숫자는 결코 내가 누군가보다 영영 앞설 것을 보장해주지도 않았고, 누군가보다 내내 뒤처질 것을 결정짓지도 않았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후 한동안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서열화와 줄 세우기는 누군가에게 뒤처져 있다는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 줄 안에 서있는 동안 누군가의 앞에 서있다는 환각이 불완전한 안정감을 주기도 하기에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완벽하게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보다 뒤처졌다는 불안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지만 동시에 내가 비난한 이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누군가들보다 앞서 있다고 착각에 빠져 우쭐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보다는 앞서 있다는 이 얕은 안정감의 근원을 내 손으로 끊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면서, 해가 거듭할수록 점점 더 내가 어떤 학점을 받았고, 몇 점의 리트 점수를 받았는지, 어떤 로스쿨을 졸업했는지는 의미가 없어졌다. 이 모든 것은 결코 그 사람의 일하는 능력을 보장하지도 못했고, 더욱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아주 아프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깨달았다. 숫자로 평가하고 평가받고, 줄을 세워서 누군가의 위에 서고 동시에 누군가의 밑에 서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를 지탱하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나자 나는 무엇으로 내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몇 년도 넘게 긴 시간을 고민해야 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하지만 얕은 생각을 버리고 그 자리를 채워줄 단단한 생각을 내 안에서 퍼올리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아니 지금도 나는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학벌과 상관없이 누구보다 뛰어나게 제 몫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단단하게 실력을 쌓아 올려 원하는 곳에서 모두의 인정을 받고 의뢰인의 신뢰를 받으며 일하는 친구를 보면서 조금씩 내가 어디에 발을 딛고 서있어야 하는지 그 발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자신에게 떳떳할 만큼 일하는 순간마다 딱 그만큼 최선을 다 하자. 서열이나 숫자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의 결과로 보여주자. 내가 경험하고 부딪치면서 배우고 쌓아 올린 실력은 오롯이 나의 가치가 된다는 것을 일을 하며 깨달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봐주지 않더라도 내가 일을 하는 모습은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에게 떳떳하도록 좀 더 노력해 보는 것. 이런 태도가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단단한 기반 위에 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일렬로 선 줄 밖에서도 오롯이 가치 있는 사람이고, 나의 능력과 노력은 몇 번의 시험에서 받은 숫자 몇 개로 다 표현해 낼 수 없다는 것. 나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찾는 것은 그런 숫자 놀음에서 벗어나 저 밖에 삶 속의 소소한 순간들에 있었고, 스스로 만족할 만큼 경험하고 배우며 쌓아 올린 시간만이 나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오랜 시간 많은 일을 겪고 그때마다 생체기가 나면서 배우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숫자의 틀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내가 그랬듯이. "그건 네가 그 경쟁해서 패배했기 때문에 하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윽박지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숫자의 세계에 있어야지만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서 입증되어야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신념을 흔드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까.
이 숫자 놀음과 줄 세우기는 학교를 벗어난 후에 만난 곳에도 여기저기 널리 퍼져 있었다. 연봉을, 아파트 평수를, 직위를 비교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경쟁을 하면서 그 안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세계에서 나오기 쉽지 않겠지. 그 세계에 갇혀 있음으로 인해서 누군가보다 앞서 있다는 인식이 주는 달콤함은 쉬이 저버릴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숫자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다소간 중요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숫자의 세계가 당신의 마음에 만족감을 줄 수도 행복을 보장해 줄 수도 없다는 것. 그러니 지금 내가 조금 뒤처져 보인다고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누군가보다 잠시 앞서 보인다 한들 결코 그게 내 가치의 전부가 아니니 또 누군가를 한 번 더 앞지르기 위해 소신을 버리거나 타인을 짓밟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혹여나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이, 나를 숫자의 틀 안에 가두어 작게 눌러 담아 정해진 고만한 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던 나의 실수를 당신은 반복하지 않기를, 당신은 조금 덜 방황하기를, 조금 덜 아파하고, 조금 더 쉬이 괜찮아 졌으면 좋겠다. 우리 부디 사람들의 시선이나 비교에 짓눌려 나를 저버리지는 말자고. 절대 그 숫자가 나의, 당신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지는 못한다고. 그 세계가 전부는 아니니 조금 두려울 수 있지만, 내가 여기 있어야지만 인정받는다고 믿었던 그 작은 틀 안에서 밖으로 나와도 괜찮다고. 그렇다고 하여 나의, 당신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나에게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그리하여 혹여나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이, 나를 그 숫자의 틀 안에 가두어 아주 작고 작게 눌러 담아 정해진 고만한 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던 나의 실수를 당신은 반복하지 않기를, 당신은 조금 덜 방황 하기를, 조금 덜 아파하고, 조금 더 쉬이 괜찮아지기를 바란다.
절대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누르며 더 이상 작아지지 말라고.
조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절대 그 숫자가 나의, 당신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지는 못한다고.
절대 그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고.
조금 두려울 수 있지만, 내가 이 곳에 존재하여야지만 인정받는다고 믿었던 그 작은 틀 안에서 밖으로 나와도 괜찮다고.
그렇다고 하여 나의, 당신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