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가 뭐죠?” 소송을 진행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아무리 내가 보고 들은 사실이 있다고 해도, 그게 제아무리 나에게는 바뀌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도 증거가 없다면 그건 주장에 불과한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내가 보고 들었다니까요! 아무리 내 말이 진짜라고 우겨보아도 소용없다. 내가 하려는 모든 주장에는 갑호증 을호증 증거를 붙여 제출해야 하고, 내가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도,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일일이 증거를 붙여 증명해내지 않으면 나에게는 없던 일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소송과 많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회사에 입사를 할 때에도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보아도 회사는 네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이유를 그동안에 쌓아온 경력과 자격증으로 설명하라고 하고, 내가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고 해도 대학교 이름과 대학에서 받은 학점으로 설명하라고 한다. 내가 아무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내가 얼마의 연봉을 받고,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로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증명해야 하고, 내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하다는 건 소셜미디어 속 좋아요와 팔로우 숫자로 증명하려고 한다. 세상은 이렇게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할만한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증거로 증명하라고 말한다.
변호사로 일을 하면 그럴듯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자라서 내가 잘 되어야 우리집이 무시를 받지 않을 거라는 마음으로 무시 받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 애를 썼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할 수 있느냐고, 어떻게 그렇게 늘 최선을 다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겉으로는 그러게요 라며 웃어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나로 하여금 열심을 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결핍을 떠올렸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학점으로, 직업으로 그리고 직장으로 말하라고 하는 사회에서 나는 자꾸만 나의 애씀을 통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때로 이 방법은 너무나 편해서 나의 직업과 연봉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은 굳이 더 품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 앞에서 나의 그럴 듯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나는 아무리 힘이 들고 몸이 망가지고 날선 사람이 되어 뾰족해져도 계속해서 더 해야 한다고 멈추면 안 된다고 나를 다그쳤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는 채로 해야만하는 일로 하루를 가득 채워 조금 더를 외쳤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 더를 외치고 다그치며 도착한 곳에서 한 숨을 돌리며 쉬려 하면 세상은 다른 사람들이 너를 따라잡고 있는데 그렇게 주저앉아 쉬면 어떡하냐며 더 연봉이 높은 회사로 가야 한다고, 더 유명한 회사로 옮겨야 한다고,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어서 집을 사야 한다고, 더 능력이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나에게 계속해서 너의 그럴듯함과 괜찮음을 증명해내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나를 채찍질하며 도착한 곳에는 또다른 다그침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정말 이 분야의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회사들에 이력서를 돌려 면접을 보고 이직을 하고,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살펴볼 틈도 없이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듯하다고 말해주는 직업을 찾아갔고, 안타깝게도 나는 재미가 없어도 의미를 몰라도 해내야 하는 일은 심지어 잘 해내 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결국엔 해내는 모습을 보며 그 모습이 멋있다고만 해주었지만 그 뒤에는 계속 해내버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면서도 바로잡을 용기도 없는 나만 남아버렸다.
오랜 번아웃에서 헤어나오려 상담실을 찾아갔다. 자꾸만 잘해내려 애쓰는데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 공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왜 나는 자꾸만 내가 보잘 것 없이 작아져 나의 괜찮음을 밖에서 찾으려 하는지 알고 싶었다. 몇 달을 지나도록 상담을 받고 나를 들여다보고 매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한참동안이나 마주하고 난 후에야 아주 오래도록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드러내어 보여주어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가난한 우리집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엄마는 우리의 가난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자존심으로 자신을 세워냈다. 그런 엄마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너지지 않고 잘 해내는 삶을 보여주어야 했다. 정작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를 고민해볼 틈도 없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향해 달렸던 나에게는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만 남았고 그런 공허함이 켜켜이 쌓여 도저히 더는 달리지 못할 것 같았던 어느 날 완전히 무너져 퇴사를 선언하고 나서야 나는 멈춰설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닌 그래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 채운 삶, 내가 무엇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기준으로 내리 내달린 삶, 자꾸만 나를 입증해서 괜찮음을 인정받으려 애쓰는 삶은 연료 없이 내달리는 차와 같았다.
사회는 여전히 나에게 너의 괜찮음을 증명해내라고 요구할지 모른다. 너의 학점과, 직업과, 연봉으로 네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내라고. 재판부에서 원고와 피고에게 꾸짖듯 그렇게 주장하는 증거를 제출하라고 다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만의 특성으로 다채롭게 아름다운 우리는 존재 자체로 의미 있고, 굳이 무엇을 해내지 않아도 살아 숨쉬는 그 자체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설령 이런 사랑을 연인이, 가족이 나에게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제 아무리 가까운 연인이고 가족이라 할지라도 외부에서 이러한 믿음을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랑과 믿음을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너나 없이 모두가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해내라고 나를 다그칠 때 나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고 있기에 쓸모나 그럴듯함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근거도 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 내가 나에게 괜찮음을,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내라고 다그쳤는지 깨달은 날 집에 돌아와 어깨를 감싸고 이불 속에 들어가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미안해. 자꾸만 그렇게 혼자 둬서 미안해. 괜찮아. 미안해. 괜찮아.”
잘 해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잘 해내지 못하고,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면 사랑받을 수 없다고, 존재가치가 없다고 느끼던 어린 아이는 사랑받지 못하는 일이 두려워 자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얼마나 힘이 남아있지 않은지 헤아려볼 틈도 없이 내달렸다. 자꾸만 지쳐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조금 더 참고 버텨내면 인정받을 수 있을거라고 그러면 쉴 수 있을 거라고 내달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내달려 도착한 곳에는 또 다른 목표가, 그 다음 내달려야 하는 기준이 생겨났다. 한참을 내달리다 완전히 힘을 잃어 주저 앉은 후에야, 그렇게 주저 앉고도 내가 이렇게 주저 앉으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창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데라며 스스로를 채근하던 작은 아이는 더는 일어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멈춰 서 스스로를 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어린아이는 조금씩 자신이 왜 그렇게 앞을 보며 달려왔는지, 앞을 보며 내달리면서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그렇게 내달린 목표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달았다. 허망함에 한참을 주저앉아있던 아이는 조금씩 자신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괜찮아. 이제는 그렇게 내달리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의 애씀을 알고,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알잖아. 그러니 괜찮아. 그러니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조금 더 일찍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만 내달려도 괜찮다고 그러니 삶에서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어 행복을 느끼고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을 행복으로 채워내면 된다고 말해주었다면 나의 지난 시간들은 조금 더 다채로운 빛으로 빛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하지만 나에게 해주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했던 많은 날들을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이미 충분해. 그러니 너의 괜찮음을, 사랑받을만함을, 그럴듯함을, 너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