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그리고 행복의 의미
변호사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다. 팔 할은 즐겨보던 미드 슈츠와 더 굿 와이프의 영향이다. 칼각이 서 있는 검은색 바지정장을 아래위로 빼 입고 직사각형의 산뜻한 서류가방을 든 채 누구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으로 구두를 또각 거리며 로펌 건물로 들어서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변호사란 저렇게 멋짐이 뚝뚝 떨어지는 직업이구나라고 생각했다. 3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도 아래위로 차려입은 검은색 정장은 지구의 열기를 끌어당겨 사람이 녹아내리게 만드는 작업복이었고, 아령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무거운 사건 기록을 들고 터져 나가게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려면 굽 낮은 편한 구두가 최고였고 그 마저도 밑창이 떨어져 구멍이 나기도 했다. 그러니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변호사라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정된 직업, 그럴듯해 보임, 부모님의 만족, 주위의 기대에 대한 부흥. 변호사가 되면 이 모든 것이 주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아니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잘은 모르지만 꽤나 괜찮은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 힘든 건 중요하지 않고 나에게 지금 이 순간에 중요한 건 무엇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행복도, 안정도, 기쁨도 모든 것은 미래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실체도 알지 못할 미래를 위해 오늘을 담보로 제공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 길을 계속 걸었다. 유독 힘이 들 때면 내가 애쓰고 참으면 좋은 것이 주어지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대체로 좋은 것은 얻기 힘든 법이니 힘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니 수험생으로 보내는 시간도, 일을 하며 버텨내는 시간도 버티면 지나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변호사로 일을 시작하고 한 해 두 해가 지나가며 나는 수험생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꾸역꾸역 하루를 버텨내며 살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지금 즈음은 무언가에 도달해 있어 평안함에 이르렀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때 나는 자주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때 재미있는지, 언제 행복한지 물어보기 시작한 건. 소개팅에 나가서도 하라는 연애는 안 하고 자꾸만 상대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자꾸만 나는 소개팅을 하러 나온 사람에게 지금 하는 일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묻고 다녔다. 그러다 자신이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때 눈에 빛이 나는 사람을 만나면 몸이 한껏 앞으로 기울어져 들려주는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운동을 하며 만난 오랜 친구는 회사에 다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요가 수업을 들으러 갔다고 한다. 요가 매트 위에 서는 순간이 즐겁고 온전히 나답다고 느꼈던 친구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요가 선생님이 되었다. 요가와 명상을 나누고 매트 위에서 수업을 듣는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순간 가득 에너지가 차오르고 행복해진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할 때 돈을 많이 벌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나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돈을 고려하면 안 돼. 그러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선택해야 하는 것 같아. 그래야 오래 지속할 수 있어.”
좋아하는 작가님은 언젠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줄 것 같은 직업을 향해 수험생으로 시험 준비를 하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친구들은 그 공부가 재미있다고 했단다. 작가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공부가 저 친구들만큼 재미있지 않은데 이 길은 저런 친구들이 가야 하는구나 라며 그 길로 방향을 틀어 제주에 내려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마감을 하고 새벽까지 공간에 남아 일을 마무리하고 손님들에게 내어줄 차를 공부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이 힘든 줄 모르고 즐겁다는 작가님은 자신의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종종 이렇게 물어본다고 했다. “나다운가, 즐거운가, 의미가 있는가”
기획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 전자공학과로 입학을 했다가 산업공학과로 전과를 했다는 한 친구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순간이 즐겁다고, 그래서 월요일과 금요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눈에서 빛이 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외교관을 꿈꾸다가 마케터로 일을 시작했고 그러다 일을 하는 순간보다 운동을 하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느꼈다는 PT 선생님은 그 길로 트레이너가 되었다고 했다. 회원들의 몸을 바로잡아주고 운동을 알려주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고 힘들어도 즐겁다고 말했다. 그 기운이 전해져서일까 트레이너 선생님과 운동하는 순간이 늘 기다려졌다.
내가 본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일이 때로는 명사로 정의되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깊은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길을 간다는 자신감과 자기 결정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적일 것 같은 직업을 택하는 게 아닌 내가 뭘 좋아하는지 깨닫고 그 길을 택하여 걷는 사람들. 모두가 말하는 안정적일 것 같은 미래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길이 아니었고 마냥 버틴다고 절로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즐거운지 충분히 고민하고 뚜렷한 생각이 떠올랐다면 주저함 없이 핸들을 꺾을 때, 그리하여 공부를 일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힘들어도 즐거울 때 그 순간에 행복이 숨어있었다.
안정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직업을 찾아 변호사를 택했고, 그런 이유로 너무나 쉽게 이 길을 택해버린 나는 일을 하며 그 의미를 찾느라 꽤나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다. 그리고 잘 해내야만 한다는 나 스스로 만들어낸 압박 속에 들어가 순간의 즐거움도 일상의 기쁨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다. 그러다 내가 완전히 소진되어 더는 내달리기만 할 수 없게 되어서야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여다본 내 일은 의뢰인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는 일이었고, 정제되지 않은 자료와 의뢰인들의 마음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하는 일이었다. 변호사가 하는 일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회사가 성장할 수 있게 그 경계를 알려주는 일이었고, 어질러진 질서와 흩어진 권리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이렇게 그 의미를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내가 하는 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호사로 일한 지 8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직업이 주는 안정감 때문도 회사가 주는 급여 때문도 사람들이 주는 인정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감각, 누굴 돕기 위해 애써왔다는 데에서 느껴지는 보상, 그리고 의뢰인들로부터 들었던 고맙다는 한마디. 이런 순간들이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게, 그리하여 내가 내 일을, 내 삶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언젠가 다가올지 모를 행복을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을 그저 버텨내는 시간으로 보내버리지 않기로 했다.
영화 ‘소울’에 나오는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어린 물고기는 나이 든 물고기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어. “전 바다라고 불리는 엄청난 것을 찾고 있어요.” “바다?” 나이 든 물고기가 말했다. “그건 지금 네가 있는 곳이야.” 그러자 물고기는 말했다. “여기는 물이에요. 내가 원하는 건 바다라고요!”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퇴근하고 올라탄 지하철 안에서 도망치듯 책을 꺼내 읽을 때, 퇴근 후에 운동을 갈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을 때, 운동을 하고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한 후 좋아하는 바디로션을 발랐을 때, 소송에서 승소했을 때, 가압류가 인용되었을 때, 고소한 사건이 기소되었을 때, 법률검토의견서를 써놓고 내가 다시 읽어봐도 잘 썼다 싶을 때, 점심시간에 먹은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을 때, 점심 산책시간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 퇴근하고 시청역 근처로 걸어가 리에제 와플을 사 먹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 대, 교대역 운동장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회전초밥처럼 귀여워 보일 때.
내가 정말 행복하다고 느낀 건 이런 아주 작은 일상의 순간들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적이라는 길을 택하는 것도, 그저 미래에는 행복이 오겠지라며 지금의 순간을 버텨내기만 하는 것도 무엇도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나다움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일에서도 찾고, 그리하여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뿌듯한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들이 늘어날 때 그때서야 나는 내 삶이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아닌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를, 그리하여 일상에서 작은 행복으로 가득한 빛나는 순간들을 그러모아 뒤돌아 보았을 때 빛나는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